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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형 시평] 한의학의 다양성과 교류의 장으로서의 동의보감
2019년 10월 24일 () 07:16:32 이태형 mjmedi@mjmedi.com
   

이태형

경희이태형한의원

근래에 한의과대학 학생들과 대화를 나눌 때면 종종 한의계 내에는 학문적 방향성이 너무 다양하여 어떠한 방향으로 공부를 해나가야 할지 잘 모르겠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한다. 필자 역시 03학번으로 한의과대학에 입학해 한의학을 공부하며 비슷한 고민을 해왔다. 처음에는 다 같이 한의학을 공부하기 위해 입학한 동기들이었는데 학생 때 어떤 선배를 만나느냐, 어떤 동아리를 들어가느냐, 혹은 어떤 공부 모임에 들어가느냐에 따라 각자가 취하는 공부 방향이 상당 부분 달라지는 경우를 목격해왔다. 졸업 후에도 비슷한 상황이 재현된다. 기초 혹은 임상에서 어떠한 전공을 가지게 되는지, 혹은 바로 임상 현장으로 나간 경우라면 어떠한 한의원에서 부원장을 시작하는지에 따라 각각의 진료 형태는 매우 다른 형태로 자리 잡고, 점차 고착화된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상황은 왜 발생할까? 그리고 이와 같은 상황이 야기하는 지금 한의학의 문제는 없을까?

미국 의과대학 교육 커리큘럼은 19세기 말 독일의 실험실 의학을 토대로 형성되었던 존스홉킨스 의과대학의 교육 모델과, 이를 토대로 20세기 초 행해졌던 플렉스너 리포트를 통해 빠르게 학문적 전문성을 구축해나갔다. 반면 한국 한의대의 교육 체계는 해방 이후 지금까지도 미국의 존스홉킨스 모델과 같은 일관된 학문적 기틀을 보여주지 못해왔다. 가장 큰 원인은 아무래도 ‘한의학의 현대화’라는 명제 하에 각 교실 혹은 각 교수님이 추구하는 방향성이 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한의사 선후배님들께서도 경험해오셨겠지만 대학 교육과정 중 교수님에 따라 추구하는 한의학 현대화의 방향이 다른 것은 꽤나 익숙한 것이었다. 물론 교수님들 간 의견이 완전히 일치할 수는 없는 것이겠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꽤나 높은 수준의 상호간 비판을 접하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교육 커리큘럼 간의 유기성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한의과대학의 교육과정을 살펴보면 겉으로 보기에는 한의학 교과목과 현대과학, 그리고 생의학 교과목이 적절히 배분되어 있는 것으로도 보이지만, 뚜렷한 학문적 방향성이 부재한 상황으로 인해 학생의 입장에서는 각 교과목을 학습해야하는 필요성이 충분히 설득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거기에 더하여 교수님들 간 한의학교육의 방향성까지 일관되지 않을 경우 학생들의 혼란은 가중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입학 후 대학 교육 초반에는 황제내경과 같은 의서를 충실히 공부하다가도, 졸업이 가까워질수록 한의 원전보다는 생의학 지식에 보다 중점을 두어 학습하게 된다. 커리큘럼 상에 있어 임상교과목과 한의 원전 간의 연계가 충분히 이루어진다면 문제가 없겠지만 안타깝게도 이 부분에서 단절이 생기는 경우가 많다. 임상교육에 있어 생의학적 관점이 강조될수록 의서를 통해 전승되어 온 한의학의 의료적 가치는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고는 한다.

졸업 후 접하게 되는 로컬 한의원 진료 현장에도 다양한 방향성이 존재한다. 의서와 관련된 학파들만 보더라도 동의보감 관련 학파, 사상의학 관련 학파, 황제내경 관련 학파, 상한론 관련 학파, 의학입문 관련학파 등 매우 다양하다. 또한 대한한의학회에 등록된 2019년 현재 총 42개의 정회원학회 목록만 보아도 특정 의서를 내세우지 않는 학회들 또한 매우 다양하게 존재함을 확인할 수 있다. 다양한 학파 혹은 학회들이 존재함은 한의학의 발전을 꾀함에 있어 분명 긍정적인 측면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만약 상호 간의 교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오히려 전체 한의계 맥락에서는 학문적 혼란이 가중될 수 있음을 인지해야 한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환자를 위한 최선의 한의치료를 목표로 한다면, 이와 같은 교류의 부재는 반드시 극복되어야 한다. 환자 입장에서 생각해 보아도 본인이 어떤 한의원에 가는지에 따라 치료의 방향성이 매번 달라진다면 한의학에 대한 신뢰는 높아지기 어려울 것이다. 치료 술기와 방법은 다양할 수 있겠지만 궁극적인 치료의 목표는 다수의 학파 혹은 학회 가운데 반드시 공유되어야 한다. 또한 본래 한의학은 학파간의 배타성을 토대로 발전해 온 학문이라고 볼 수도 없다. 각가학설을 참고해 보아도 상한학파, 하간학파, 역수학파, 공사학파, 단계학파, 온보학파, 온병학파 등 다양한 학파가 존재하기는 하지만 이들 학파들은 상호 배타적 관계를 가진다기 보다는 앞선 의가의 의의를 받아들이면서도 동시에 앞선 의가가 가졌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행해졌던 노력들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필자는 동의보감과 같은 종합의서의 존재가 학파 간 융합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좋은 예시가 된다고 생각한다. 주지하다시피 동의보감은 漢唐 이래의 의서부터 宋元明代에 이르기까지 대표적인 의서 200여종 이상을 인용하고 있으며, ‘述而不作’의 방식으로 다양한 의서의 문장들을 인용하여 각 목차의 내용을 구성하였다.1) 때문에 당시까지의 수많은 의서의 내용을 일관된 학문적 방향성을 토대로 효과적으로 통합해 냈다는 것이 동의보감이라는 의서가 가지는 중요한 의의 중 하나라고 하겠다.

예를 들어 동의보감 내경편 담음문의 ‘王隱君痰論’ 조문에서 흥미로운 서술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조문은 우선 왕은군을 인용하여 痰證과 관련된 수많은 증상들을 잔뜩 소개한다. 온 몸을 걸쳐 담음과 연계될 수 있는 증상들은 모두 언급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정도이다. 왕은군은 이 같은 다양한 담증을 치료하기 위해 침향곤담환을 만들었으며, 이로써 삼초의 담음을 두루 치료하는 약으로 삼았다. 하지만 곧바로 허준은 유종후의 말을 인용하여 이에 대한 비판적 견해도 함께 소개한다. 유종후는 왕은군이 침향곤담환을 만들어 담증을 두루 치료하는 것이 간편할 수는 있지만, 질환의 원인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치료이기에 문제가 발생할 수 있음을 지적하였다. 또한 장중경과 진무택의 의론을 인용하여 보다 상세한 원인을 진단하여 치료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하였다. 특정 치료가 의미가 있다고 여기에만 매몰될 것을 우려한 허준의 조치라고 할 수 있다.

특정 질환에 대해 다양한 의가가 강조하는 다수의 원인을 균형 있게 소개하려는 허준의 노력은 동의보감 곳곳에서 발견된다. 동의보감 잡병편 풍문 ‘中風所因’ 조문도 그 중 하나이다. 이 조문에서 허준은 금원사대가 중 3명의 의론을 소개한다. 하간은 풍병이 대부분 熱이 성해서 생긴다고 하였고, 동원은 本氣에 의한 병이라고 하였다. 한편 단계는 濕生痰 痰生熱 熱生風의 맥락에서 풍병이 발생한다고 주장하였다. 허준은 앞선 세 의가의 주장에 대한 왕안도의 평을 덧붙인다. 그는 옛 사람들이 중풍의 원인을 風이라고 하였지만, 이와는 다르게 하간은 火, 동원은 氣, 단계는 濕이라고 하여 중풍을 오히려 허한 현상으로 여겼음을 설명하였다. 그리고 이를 종합하여 진중풍과 유중풍을 감별할 때 정말 外感 風으로 인한 경우는 진중풍이지만 火氣濕으로 인한 경우는 유중풍으로 보아야 한다는 의견을 개진한다. 그런데 허준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의학정전을 저술한 우단의 의론을 덧붙인다. 우단은 왕안도의 진중풍과 유중풍의 구별에 동의하지 않았으며, 고인이 말한 風은 겉으로 드러난 증상을 말한 것이며 후대의 세 의가가 말한 火氣濕의 구별은 원인을 말하는 것이라고 정리하였다.

이전에 우연히 「동의보감 체재의 통합과학에의 응용」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접한 적이 있었다.2) 이 논문은 물리교육과 교수의 저술이었는데, 극도로 세분화된 과학을 효과적으로 통합하여 교육하기 위한 방편으로써 동의보감 체재를 분석하여 활용해보자는 주장을 펼치고 있어 흥미롭게 읽었던 기억이 있다. 이 논문에서는 결론부에서 동의보감의 의의로 “논리적 일관성의 유지”, 그리고 “다양한 자료의 체계적 분류와 정리 원칙의 수립” 등을 이야기 하였다. 다시 말하면 동의보감은 분명한 학문적 기준점이 존재하였기 때문에 다양한 자료들을 체계적으로 분류하고 정리할 수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처럼 한의학은 역사적으로 다양한 학파가 존재해왔지만 그 가운데에 공유될 수 있는 학문적 기준점이 존재해왔기 때문에 환자를 위한 보다 나은 치료를 위한 노력을 지속해 올 수 있었다. 하지만 이 같은 노력은 20세기 이후 생의학이 의료의 중심에 위치하게 되면서 급속도로 위축되어 왔으며, 특별한 구심점 없이 로컬 임상 현장에서 다양한 형태로 살아남게 되었다. 그리고 이 같이 한의학의 기준점이 불분명해진 상황에서 현재 한의계 내에는 본래 한의학이 가져왔던 학문적 기준점이 아닌, 생의학을 중심에 두고 한의학을 덧붙이는 형태로 학문 체계를 재구성하려는 시도가 일어나기도 한다.

하지만 한의학이 본래 가져왔던 학문적 기준점이 고려되지 않은 형태의 시도들은 또 다른 혼란을 야기할 수 있기 때문에 많은 부분 우려가 된다. 미국의 존스홉킨스 의과대학은 독일의 실험실 의학을 기초로 전문성을 구축해 나갔지만, 이 모델이 한국의 한의과대학 교육의 기준점이 될 수는 없다. 전문성을 높여가야한다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그 방향성에 있어 무조건적인 국제기준 충족보다는 한의학의 의료적 가치를 최대한 끌어올릴 수 있는 방안이 함께 모색되어야 한다. 동의보감의 통합적 구성을 통해 가능성을 엿볼 수 있었듯, 상호 간 열린 자세로 다시금 한의학 논의의 구심점을 확보하여 앞으로 보다 많은 교류와 발전을 함께 일구어나갈 수 있기를 희망한다.

 

각주

1) 김중권. 東醫寶鑑의 文獻的 硏究. 서지학연구. 1995; 11: 207-243.
2) 최종범, 이수경. 물리교육: 동의보감 체재의 통합과학에의 응용. 새물리. 2000; 40(3): 155-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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