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북한의 신년공동사설은 이전의 기조와는 상당히 달라졌다. 상투적인 표현들이 사라지고 정책제안 중심의 차분한 어조로 바뀌었다. 우선 사설제목이 “당 창건 65돌을 맞는 올해에 다시한번 경공업과 농업에 박차를 가하여 인민생활에서 결정적 전환을 이룩하자”로 되어 있다. 김일성의 신년사가 김정일의 신년공동사설로 대체된 1995년 이래 이번 사설만큼 제목이 구체적으로 적시된 적이 없다.

지금까지 신년공동사설은 대개 거대담론이나 추상적 구호로 일관했었다. “위대한 당의 령도를 높이 받들고 새해의 진군을 힘있게 다그쳐 나가자”(1995년)라거나, “당창건 55돌을 맞는 올해를 천리마대고조의 불길속에 자랑찬 승리의 해로 빛내이자”(2000년), “전당, 전군, 전민이 일심단결하여 선군의 위력을 더 높이 떨치자”(2005년)라는 데서 보듯이 천리마 대고조, 강성대국, 선군의 기치 등 거대담론과 구호를 앞세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올해 경공업, 농업, 인민생활 등 구체적인 정책방향을 구호로 내건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사설제목을 인민생활로 한정한 것은 김정일 위원장의 의중이 강하게 반영된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김일성·김정일 문헌을 읽다보면 그 내용 가운데 사건이 구체적으로 언급되거나 직설적인 표현들이 발견되는 경우가 있다. 인민생활 향상에 대한 김정일의 생각은 198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80년 6차 당대회 이후 8.3인민소비품 증산운동과 합영법 등 개혁·개방조치들을 전격적으로 실시하기에 앞서 1984년 2월 16일 “인민생활을 더욱 높일데 대하여”라는 자신의 ‘신경제정책’을 발표하였다. 경공업과 농업에 다시 한번 박차를 가하여 주민생활을 향상시켜야 한다는 내용을 구체적으로 언급한 것은 김정일 위원장의 의중이 직접적으로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인민생활 향상” - 공동사설의 키워드

2010년 공동사설의 키워드는 단연 “인민생활 향상”이다. 공동사설에서 ‘인민생활’이라는 단어가 18번이나 사용되고 ‘인민생활 향상’을 9번이나 언급하고 있는데서 얼마나 이 부분에 큰 비중을 두고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신년공동사설의 제목은 1년 동안 북한주민들이 사용하는 구호인 만큼 공동사설 제목에 “경공업과 농업”, “인민생활”을 언급한고 있어서 올 한해 북한은 대대적으로 “인민생활 향상”을 구호로 활용할 것이다.

그러나 인민생활을 어떻게 향상시켜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방법으로 제시된 것이 없다. 지방공업을 더 발전시키고 농업부문에서 당이 제시한 여러 영농방법을 구현해야 한다는 정도에 그치고 있다. 인민생활과 관련한 투자를 늘리고 경공업 생산에 필요한 원료와 자재를 원만히 보장하라고 지시한 대목에서 문제점을 인식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만, 구체적 해결방법은 내놓지 않고 있다. 다만, “대외시장을 확대하고 대외무역활동을 적극적으로 벌려 경제건설과 인민생활향상에 이바지하여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국가차원에서 국내적으로 부족한 원자재를 해외시장에서 적극적으로 수입할 채비를 하고 있는 정도가 아닌가 싶다. (연초부터 나선시를 특별시로 지정한 것을 보면 이러한 속내를 읽을 수 있다).

공동사설의 제목이 경공업과 농업에 다시한번 박차를 가하자고 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사설의 내용을 보면 오히려 금속, 전력, 석탄, 철도운수 등 ‘4대선생부문’에 더 비중을 두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정보화시대, 지식경제시대를 맞아 새로운 도약의 근본비결을 첨단기계설비와 기술개발에 있다고 강조하고, 특히 국방공업의 중요성을 언급하고 있다. 작년과는 달리 올해 신년공동사설이 확실히 군사나 정치보다는 전반적으로 경제문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은 사실이나, 제목에 구호로 제시된 것만큼 경공업과 농업발전, 인민생활 향상을 위한 구체적인 지침을 제시하지 않고 있는 것은 의아스럽다.

더군다나 객관적 정황으로 보더라도 북한주민들의 생활수준이 2010년이나 2012년까지도 획기적으로 향상될 것 같지는 않다. 작년 말에 단행한 화폐개혁이 일시적인 정치사회적 안정효과를 보고 있으나, 머지않아 인플레이션과 경제침체가 반복될 것이 분명해 보인다. 지난해에 150일 전투와 100일 전투가 농업분야에 집중되었었는데, 금년 한 해도 “다시 한번” 경공업과 농업에 박차를 가하자고 한 것을 보면, 민심수습이 그만큼 급박하거나 아니면 또 다른 어떤 정치적 의도가 있지 않을까 추측된다.

7차당대회 및 후계승계를 위한 명분 만들기

북한이 인민생활 향상을 키워드로 제시하면서도 전반적으로 내부개혁이나 변화를 촉구하는 대신 “사회주의계획경제의 우월성이 뚜렷이 나타나게 하여야 한다”라고 한 대목에서는 북한이 작년에 계획경제에 대한 자신감을 회복한 것이 아닌가 라는 추측을 낳게 한다. 지난해에 북한은 “주체철 생산”과 “CNC기술”을 획기적인 사변으로 간주하고 여기에 무척 고무되어 있는 것 같다. 북한은 작년부터 철광과 석탄 등 광물을 원료형태로는 수출하지 못하도록 지침을 내리고 자력갱생의 시동을 재가동하고 있다. 우리의 포항제철과 같은 선진국형은 아니지만, 고난의 행군 이후 폐허가 되다시피 한 북한의 경제상황에서 자체의 원료를 사용하여 철을 생산하는 조건을 갖추었다는 사실은 경제발전에 대한 자신감을 갖기에 충분할 것이다. “강재가 나와야 쌀도 나오고 기계도 나온다”는 대목에서는 경공업과 농업에 다시 한번 박차를 가하여 인민생활의 수준을 결정적으로 높이겠다는 북한의 신년구호가 무색해진다.

경제회복과 인민생활의 문제는 북한으로서 절체절명의 과제다. 2012년 강성대국의 문을 연다고 공언했고, 후계체제를 안정적으로 구축하려면 인민생활 문제를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 이러한 중차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당에 그 책임이 주어졌다. 물론 2010년이 당창건 65주년이기 때문에 제목에서부터 강조된 측면이 없지 않으나, 인민생활 문제를 최우선에 놓고 당조직 정비를 언급한 것은 김정일 위원장으로서 각별한 의미가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김정일 위원장은 인민생활 문제를 오래 전부터 7차당대회와 연결시켜 왔다. 김위원장이 대국민 정치활동을 시작하던 1980년대에 “수령님께서는....인민생활을 한 계단 더 높이고 당 제7차대회를 하여야 한다고 교시하시였습니다. 인민생활을 한 계단 더 높이고 당 제7차대회를 하려는 것은 우리 당의 확고한 결심입니다”라며 이 문제의 중요성을 언급한 바 있다. 이번 공동사설에서도 “인민생활을 높이는 것은 경제실무적 사업이 아니라 어버이수령님(김일성 주석)의 유훈을 관철하고 인민들의 천만 가지 이상을 꽃피우기 위한 우리 당의 위업의 정당성을 과시하는 중요한 정치적 사업”이라고 강조하였다. 이런 점에서 인민생활 향상문제를 이 시기에 다시 한번 언급한 것은 7차당대회 개최를 염두에 둔 사전포석이 아닐까 생각한다. 물론 이것이 올해에 적용될지 아니면 2012년을 겨냥한 것인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김정일 위원장이 당대회 개최를 “인민생활 향상” 문제와 결부시키고 있다는 사실은 주시해 볼 필요가 있다.

남북·북미 관계 개선에 대한 높은 기대

남북관계와 대외관계는 매우 담담하게 표현되어 있다. 특히 대외관계는 아주 간단하게 언급되어 있다. 예년의 경험으로 보면 남북관계나 북미관계가 매우 중대한 기로에 서 있을 시기에는 신년공동사설에 구체적인 표현을 자제한 경우가 많았다. 이번에도 남북문제와 북미관계에 대한 언급이 차분한 어조로 되어 있는 것은 남북관계와 북미대화가 살얼음 걷듯 진행되고 있는 현실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남북관계에서는 북한이 작년에 남북대화에 적극적으로 임했다는 사실을 언급했다. “지난해에 악화된 북남관계를 개선하고 조국통일의 전환적국면을 열기 위하여 주동적이며 대범한 조치들을 취하면서 성의있는 노력을 기울였다”고 언급하며, 이러한 시도가 “내외의 커다란 지지와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북남사이에 대화와 협력의 분위기를 조성”했다고 평가하였다. 이는 김대중 전대통령 조문과 현대아산을 통한 관계개선 의지 표명이 진정성 있는 제안이라는 뜻을 전달하려는 것 같다. 이어 올해가 6.15공동선언 10주년과 고려연방제 제안 30주년임을 상기하며 관계개선 필요성을 강조했다.

북한의 이러한 태도는 남한당국에 대해 거칠게 비난하던 작년과는 사뭇 달라진 것이다. “남조선당국은 대결과 긴장을 격화시키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하며 북남공동선언을 존중하고 북남대화와 관계개선의 길로 나와야 한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지난해 남한지도부에 대해 “파쇼독재,” “미쳐 날뛰는” 등의 거친 표현으로 비난했던 것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북한의 이러한 표현법은 현재 남북간에 정상회담이나 고위대화에 대한 논의가 물밑에서 진행되고 있거나 이러한 관계개선에 대한 기대감을 드러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명박 대통령도 신년 국정연설에서 “올해는 남북관계에서 새로운 전기를 만들어 내야 한다”는 의지를 피력하여 남북관계 개선에 대한 기대는 그 어느 때보다 높다.

북미관계에 대해서는 이번에도 “근본문제는 조미사이의 적대관계를 종식시키는 것”이고 “대화와 협상을 통하여 조선반도의 공고한 평화체제를 마련하고 비핵화를 실현”하는 것이라고 짧게 언급하였다. “비핵화”라는 표현을 작년에 처음 사용한데 이어 올해에도 강조하고 있는데, 비핵화 카드를 활용하여 올해에도 평화체제 구축 시도를 적극화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를 위해 북미 연락사무소 개설과 같은 관계개선을 통해 경제활성화를 위한 미국의 도움을 기대할 것으로 예상된다.

남북정상회담의 조건

그러나 남북정상회담은 김정일과 이명박 정부 모두에게 탐나는 과실이면서 동시에 부담스러운 목표일 수 있다. 우선 북한과의 대화 자체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남한 내부의 극우 세력들의 비판은 이명박 정부에게 부담이 될 수 있다. 지금까지 이명박 정부는 남북간 대화의 모든 것을 비핵화와 연계시켜왔는데, 정작 정상회담이라는 최후의 카드에도 비핵화에 결정적인 진전을 보이지 못한다면 그동안 진보 진영에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러왔던 “퍼주기” 논란에 스스로 휘말려 이제 3년차에 접어든 정권의 레임덕이 빨라질 가능성도 없지 않다.

북한 입장에서도 이제 2년밖에 남지 않는 강성대국 건설의 목표에 화룡점정이 되어야 할 남북정상회담에서 가시적이고 실질적인 성과를 내지 못하고 차기 남한 정부와 또 처음부터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야 하는 입장에 내몰리는 것은 매우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인민생활에서 가시적 성과를 달성함으로써 후계문제와 당대회 등 정권의 명운이 달려 있는 중차대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서 남한이나 미국과 같은 불확실한 변수에 운명을 내맡기는 모험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작년 말 남북한이 정상회담 물밑접촉을 했으나, 북한측은 남한이 그랜드바겐을 조건으로 요구하여 정상회담을 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돌아갔다고 한다. 북한이 그랜드바겐을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이명박 정부가 뒤로 물러서든지 해야만, 남북정상회담은 가능할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신년 국정연설에 ‘그랜드바겐’이 빠져 있는 것이 혹시 이명박 정부가 정상회담을 위해 유연한 전략을 구사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기대를 걸어본다.

신년공동사설에 나타난 북한의 2010년은 북한의 기대와는 달리 험난한 한 해가 될 것이 분명하다. 개혁과 효율에 대한 구체적 대안 없이 자력갱생과 계획경제로 주민들의 생활수준이 나아질리 만무하다. 남북정상회담과 북미평화협정이 타결된다는 보장도 없다. 도로개보수나 살림집 건설 등으로 주민생활 분위기를 바꾸어 보는 정도에 그칠텐데, 금년의 “인민생활 향상” 구호를 가지고 북한 지도부가 당대회 개최 명분을 어떻게 만들어 갈지 자못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