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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반추(反芻)
대한민국 제헌헌법에 충실하자
2019년 08월 11일 (일) 22:17:23 진동은 kpm1232@ccnkorea.com
민비와 흥선대원군은 정권을 빼앗긴 것이 아니라 나라를 빼앗기었다. 1894년 동학란이 벌어질 때 청에 원군을 요청한 것이 파국의 시작이었다. 세상에 어느 나라 정부가 자국민의 민중항쟁을 진압하기 위해 외국군을 불러들이는가? 조선은 이때 정부로서 백성을 다스릴 정통성을 상실하였다. 천진조약을 빌미로 일본군도 조선으로 밀려들어왔다. 일본군은 6월 21일 경복궁을 점령하고 고종과 민비를 연금시킨 다음 친일정권을 수립시켰다. 8월 20일 일본 낭인들은 민비를 시해하여 불태워버렸다. 이 때 국가로서 조선은 이때 이미 끝장난 것이다. (1392-1894) 고종은 1863년에 즉위하였고 1873년에는 민비의 두뇌에 힘입어 대원군으로부터 통치권을 장악하였다. 일본에서 명치유신이 일어난 것이 1868년, 운양함 사건을 일으킨 것이 1876년이다. 그런데 1877년 일본에서는 사이고 다카모리를 정리하는 서남전쟁이 벌어졌다. 당시 일본의 국력과 군사력을 돌이켜 보면 별로 신통하지가 않았다. 1895년 일본은 청일전쟁을 일으켜 청국을 이겨내어 대만을 식민지로 삼았는데 이때의 배상금 2억량이 노일전쟁을 치르는 군비건설의 밑받침이 되었다. 원래 3억 량이었는데 강화회담에 참석한 이홍장을 일본 청년이 저격하자 국제 여론이 비등되어 2억 량으로 깎였다. 조선은 이 동안 백성의 힘을 동원하지 못하였다. 대원군, 민비, 고종 어느 누구도 민중의 힘을 조직, 동원하지 못하였다. 고종이 일제에 이러 저러한 저항을 했다는 것은 한낱 에피소드 일 따름이다. 선조가 임진왜란에서 백성의 원한의 대상이 되었고 병자호란 때 인조가 백성을 동원하지 못하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조선이 망할 때도 왕실은 백성과 거의 유리되어 있었다. 태국 왕실은 영국과 프랑스의 압박 속에서도 국민의 존경과 신뢰를 기반으로 균형외교로 독립을 유지하였다. 조선은 백성의 뒷받침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권력의 중심인 왕실이 사로잡히자 허망하게 무너지고 만 것이다. 순조 이래 60년 동안 안동김씨의 외척세도로 백성의 곤궁이 극도에 달하였는데 대원군은 경복궁 중건에 힘을 쏟는 등 민력 회복을 위한 실질적 개혁을 하지 않았고 고종의 친정 이후로는 여흥민씨의 외척세도가 발호하였으니 임오군란과 동학란이 이에 말미암은 것이었다. 급기야 동학란을 진압한다고 청군을 끌어들였으니 이것이 결정적이었다. 반추하여 보건대 이것이 조선이 망하게 된 '종말의 시작'이었다. 왕실이 허무하게 국권을 상실한지 10년을 지나서야 비로소 민중의 의식이 깨어서 기미독립운동으로 폭발하니 이것이 민족 민주 민중의 정치의식이 뚜렷이 결집된 진정한 근대 한국의 시작이다. 1919년 4월 13일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대한제국의 복원이 아니라 민주정부의 수립으로 된 것은 3•1 운동에 나타난 국민의 힘과 정치의식의 반영이다. 미국 국민이 헌법을 받들듯이 우리도 한민족의 기미독립선언문을 기초로 한 대한민국 제헌헌법에 충실하자. 이것이 애국이며 구국의 길이다. 역사에서 선의와 의지는 중요하지 않다. 오직 결과만이 차디차게 남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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