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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월남은 어떻게 패망하게 되었는가?
‘피 흘리는 전쟁’과 ‘피 안흘리는 전쟁’
2013년 12월 11일 (수) 20:15:09 한기총신문 webmaster@ccnkorea.com

대선이 1년이나 지났지만 일부 종북세력들은 그 결과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새누리당의 무기력도 문제이지만 종북세력들은 종교계와 노동계, 언론계, 교육계, 사법계, 정치계 등 모든 역량을 동원하여 국민이 뽑은 박근혜 정부를 위협하고 있다. 그런데 요즘 대한민국 사회를 보면 마치 자유월남의 패망과 너무 많은 면에서 유사한 점을 발견하게 된다. 역사학자 E.H 카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 없는 대화라고 했다. 자유월남의 패망은 대한민국 국민들에게도 큰 충격으로 다가왔으며 수많은 보트피플들이 나라 잃은 설움으로 떠돌아 다녀야 했다. 이때 대한민국이 굳건한 한미동맹과 박정희대통령의 자주국방의지가 없었다면 제2의 자유월남이 되는 것은 시간 문제였을 것이다. 이에 지금의 대한민국의 안보현실을 되돌아 보며 자유월남 패망의 그때 그 순간들과 얼마나 유사한 방향으로 흐르는 지를 자각하고 안보의식을 더욱 굳건히 해 나가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월남의 두 가지 전쟁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보름 만에 두 나라가 공산화 됐다. 1975417일에는 캄보디아가 공산화 됐고 1975430일에는 자유월남이 공산화 됐다. 실로 어이 없는 일이었다. 캄보디아가 패망한지 나흘째 되는 1975421, 월남 대통령 티우는 눈물의 사임을 발표했다. ‘티우의 뒤를 이은 후옹대통령은 불과 5일 만에 그 자리를 또 장군에게 넘겨주었고 대통령은 불과 3일 만인 430, 베트콩과 월맹군에게 허무하게 항복하고 말았다. 400만명이 죽거나 다친 30년간의 월남 전쟁은 공산주의자들에게 패망하는 것으로써 끝을 맺었다. 당시 세계 4위의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던 자유월남. 미국은 월남전쟁에 1,500억 달러의 돈을 들였고, 미군 장병 5만명 이상을 월남전에서 잃었다. 우리국군도 1965년 이래 8년간 월남 땅에서 피흘려 싸웠다. 공산화된 캄보디아와 자유월남은 이 모든 희생의 의미와 가치를 빼앗아가 버렸다. 중국 공산당의 모택동은 모든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고 했거니와 공산주의자들의 폭력주의의 본질이 다시 한번 증명된 것이다.

어떤 사람은 베트콩의 공격이 격화되고 있다는 보도가 나오자 티우 정권이 미국의 원조를 계속 확보하기 위해 과장보도를 하고 있을는지도 모른다고 했었지만, 그런 추측과 의심이 얼마나 근거 없는 낭설이었는가 하는 것이 증명되었다. 공산주의자들의 침략을 과소 평가하는 것이 잘못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은 때였다.

월남전에는 두 가지의 전쟁이 존재하고 있었다. 하나는 피 흘리는 전쟁이요, 다른 하나는 피 안 흘리는 정치 전쟁이다. 결국 자유월남은 피 흘리는 무력전쟁피 안 흘리는 정치전쟁이라고 하는 두개의 전쟁에서 모두 지고 만 것이다.

자유월남의 거듭되는 혼란과 분열

자유월남이 공산화 된 것은 군사적인 면에서만 진 것이 아니다. ‘피 흘리는 전쟁에서만 진 것이 아니고 어떻게 보면 피 안 흘리는 전쟁에서 먼저 진 것이다. 베트콩은 이 피 안 흘리는 전쟁’, 즉 정치 전쟁에서 이기기 위하여 이른바 통일 전선의 전략전술을 교묘히 사용하여 내부로 부터의 와해를 끈질기게 공작해 왔다.

그런데도 자유 월남은 바로 이 같은 베트콩의 전략 전술에 휘말리는 줄도 모르고 민주인권이니 떠들고 날뛰는 사람들 때문에 완전히 분열과 혼란의 도가니 속에 빠져들었다. 여기에는 종교인들이 한 몫 했다. 공산화 이후 모두 숙청 당했지만 광범위한 민중의 지지를 받던 짠후탄 신부가 월남 중부전선의 전투는 월맹군의 침략이 아니라, 민중의 봉기이며 따라서 월남 내의 내전의 문제라고 주장하는 한, 그리고 친북 좌파 쪽으로 기울어진 자유월남의 여론이 그 주장에 동조하는 한 미국은 파병할 수 없었다. 요즘 천주교정의구현 사제단을 비롯 일부 종북 승려들과 목사들의 기도회는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과거 문익환 목사처럼 민중을 빛이 아니라 어둠으로 인도하던 짠후탄 신부는 너무도 정치적 편견이 심한 나머지 월맹군의 분명한 침략마저 침략으로 보이지 않을 만큼 분별력이 흐려졌었다. 그리고, 그의 멍청한 판단과 억지는 자신도 처형됨은 물론 자신을 추종하던 친북 좌파와 그가 어둠으로 인도하던 신자들을 포함하여 900만명이나 학살되게 하는 비극을 초래하였다. 그는 과거 한국의 문익환 목사처럼 남남 분열을 초래한 엉터리 성직자였다. 이처럼 월맹의 지도자 호치민이 월남인의 신앙대상인 불교의 승려와 천주교의 신부들을 이용하여 월남인들에게 반미와 미군철수, 월맹군 지원 쪽으로 국민선동을 한 것을 자유월남패망의 우선순위로 뽑을 수 있겠다. 자유월남의 붉은 신부들은 월남인의 대다수 신앙대상인 불교를 이용하기 위해 좌파 승려들에게 민주화를 위한 연대라는 미명으로 포섭하여 성당의 은밀한 교육장소에서 반미, 미군철수운동과 월남패망을 위한 특별교육을 시켰다. 승려들의 분신자살로서 월남인들을 선동하도록 배후 조종했고, 그 공작은 주효하여 불교를 신앙하는 신도들은 분신자살하는 승려들이 고무 하는 대로 월남패망을 앞장 서 음모는 성공했다. 베트남 전쟁 당시 전쟁반대를 주장하며 1963611일 분신자살(焚身自殺)한 승려 '틱쾅둑'(Thich Quang Duc) 이후 베트남에서는 종교인들의 분신자살도 끊임없이 발생했다. 이러한 종교인들의 선동은 지금 대한민국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공산주의자들의 수법은 세월이 지나도 변함이 없음을 입증한다.

그로 말미암아 자유월남 정부는 강력한 반공투쟁을 전개해 나갈 수 조차 없었다. 미국이 월남을 포기하게 된 것도 이 같은 내부 혼란에 일단의 책임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며, 군사적 패배보다도 정치전쟁에서 진 것이 더 큰 원인이었다고 하겠다.

거짓된 평화와 연방제 주장

전국 각지에서 준동하던 베트콩들은 1960 1220남부 월남 해방 민족 전선을 수립했다. 남부 월남 해방 민족 전선이라는 것은 1961년 하노이 방송이 확인 했듯이 공산 월맹의 지원 아래 북위 17도선 이남을 관장하려는 월남 공산당, 즉 베트콩이다. 베트콩은 자신이 공산주의자임을 속이고 민족, 민주연합정부를 세우자느니, 평화와 중립 정책을 쓰자느니 하는 위장된 구호를 내세웠다. 이들은 196969일 이른바 남부월남 임시혁명정부를 세우고 이들이 월남 인민의 유일하고도 진정한 대표라고 선전했다. 이들 베트콩이 주장한 것은 한결 같이 월남의 합법적인 민주 정부를 전복시키는 것이었다. 마치 지금의 대한민국이 합법적으로 선거에서 당선된 대통령을 흔들고 통합진보당과 민주당이 코리아 연방을 운운하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수법이다.

공산주의자들은 항상 민주주의를 운운하며 정부를 전복하고 혼란을 일삼는 것으로 그들의 투쟁 전법을 삼았다. 1949년 부터 1955년까지는 당시의 베트남 국왕 바오다이를 타도하자는 것이 그들의 투쟁 목표이었다. 그리고 고 딘 디엠이 1955년 대통령에 당선되자 이번에는 고 딘 디엠 타도를 들고 나왔다. 19679월 티우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베트콩은 다시 티우의 사퇴를 요구 하고 나섰다. 1975421일 티우 대통령이 사임한 것도 베트콩의 이 같은 주장을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취해진 것이다. 그러나 불과 10일 동안 대통령은 두 번씩이나 바꾸었지만 그 종말은 무조건 항복이라고 하는 참담한 최후가 있었을 뿐이다.

당시 정치 지도자들의 문제는 매우 심각했다. 보는 시야가 짧은 정치인들의 불행은 햇볕정책이 성공한 정책임을 내세우기 위해 김대중이 그랬던 것처럼, 평화협정이 성공적이었음을 과시하기 위하여 티우 대통령이 전쟁의 위험이 없다고 주장한 것과 같다. 거짓 평화를 말하는 자들에게 그것은 신념이 되어버린다. 이런 평화 무드 속에서 세계 제4대 군사강대국이었던 월남군은 주적의 개념마저 상실하고 있었다.

응답하라 대한민국!

베트콩들이 1968구정공세라는 대대적인 공세를 취했으며 이러한 공세를 당하고도 월남의 일부 지식인과 전직 관료들은 사이공과 후에에서 이른바 월남 민족·민주·평화세력 연합이라는 것을 결성하여 반정부 운동을 적극화 했다. 그 결과 미국은 월남의 평화 협상에서 베트콩을 대화의 상대로 인정하기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불법단체인 베트콩과 불법집단인 이른바 남부 월남 임시 혁명 정부가 대화와 협상의 자리에 까지 나오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들 제 3세력은 월남 국민의 양심과 정의를 대변하고 있다고 자처하는 소위 민주인권을 부르짖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선거를 통해서 월남 국민의 지지를 얻어 정권을 잡을 만한 국민적 지지도 없었으며 오로지 자신들의 정권욕에만 눈이 어두워 데모와 총파업, 일부 언론을 선동해 국론을 분열시키고 사회 혼란을 조장하는 것을 그들의 유일한 정치 투쟁으로 삼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자유월남 사람들은 공산주의와 싸우면서도 반공 사상은 희미했다. 오히려 공산주의를 지지 할 수 있는 자유를 달라고 외쳤다. 그리고는 모두의 생각이 달랐다. 종교인은 종교인대로, 학생은 학생대로, 소위 민주세력은 그들대로, 모두의 생각이 달랐다. 그러므로 국민의 일치된 총의라는 것이 없었다. 이와 같은 국론의 분열과 내부의 혼란을 안고 적어도 공산주의자와 대결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도 명약관화한 일이다. 패망 당시 자유월남에는 공산당원 9500, 인민혁명당원 4만 명, 즉 전체 인구의 0.5% 정도가 사회의 밑뿌리를 뒤흔들고 있었다. 5만 명의 월맹간첩들은 민족주의자, 평화주의자, 인도주의자로 위장한 채 시민·종교단체는 물론 대통령비서실장과 장관, 도지사 등 권력핵심부를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이 간첩이었다는 사실은 미군의 전면철수 후 자유월남패망으로 수많은 시민들이 죽어간 이후에나 확인됐다. 1967년 치러진 베트남 대통령 선거에서 차점으로 낙선된 야당지도자 쭝딘쥬도 대표적 간첩이었다. 그는 외세를 끌어들여 동족들끼리 피를 흘리는 모습을 조상들이 얼마나 슬퍼 하겠냐면서 월맹에 대한 포용정책을 주동했다.

간첩들이 가장 많이 침투했던 것은 시민·종교단체의 부패척결운동과 반미·반전평화운동이었다. 그리고 이들이 선전선동을 통해 대중적 지지기반을 확대해가면서, 국방과 안보를 강조하는 사람은 전쟁에 미친 또는 정신 나간 사람으로 취급받았다. 반공을 외치고 나라를 위기에서 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애국인사, 언론인들이 다음날이면 시체로 발견됐고, 이들의 가족-친지들이 사회에서 불이익을 받았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현실과 자유월남은 명백히 다르다. 하지만 대한민국 역시 국가안보에 대해 저들 종북세력과 동조하는 순간 우리의 위장된 평화는 순식간에 사라져 버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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