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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광주에 왔던 북한특수군, 6년만에 입 열다(전문)
2012년 08월 22일 (수) 00:07:03 한기총신문 webmaster@ccnkorea.com

아래 글은 16세에 북한군 특수부대에 입대하여 특수기술만 훈련하면서 인생을 시작한 사람이 19세 때 지휘관 호위병으로 5.18광주에 왔던 이야기를 또 다른 탈북자의 필력을 빌어 남한 세상에 처음으로 내놓은 첫 번째 증언이다. 5.18광주에 북한특수군이 왔다는 데 대해 이처럼 확실한 증거는 없다. 광주 주변 산에 있으면서 고첩들이 가져다 준 빵과 고등어 반찬의 맛이 황홀했다고 한다.

글을 배울 나이에 인간기계로 훈련됐기에 그는 스스로 글을 쓸 능력이 부족했을 것이다. 그런데다 노무현 시절(2006)의 국정원이 ‘광주에 왔었다는 말을 입 밖에 내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는 수가 있다’는 협박을 원체 강력하게 받았고, ‘광주의 비밀을 지키겠다’는 ‘보안각서’까지 썼기에, 우리는 지난 6년동안 ‘광주에 왔던 북한특수군이 분당에 살고 있다’는 사실까지만 확인했지 그를 만날 수가 없었다.

마침 같은 함경도로부터 탈북한 의협심 있고 필력 있는 탈북자 이원명이 사명감을 가지고 가명 김명국의 ‘광주참전기’를 꼼꼼하게 챙겨 세상에 내놓았다. “5.18광주 사태 당시 북한군의 총에 맞아 세상을 떠난 국군 장병들과 시민들, 경찰들에게, 또한 이 나라를 지키고 있는 국군 장병들과 애국적인 국민들에게 이 글을 삼가 드린다.”는 맺음말에 탈북자 이원명씨의 사명감이 배어 있다. 이리폭발사건, 아웅산 폭발사건도 김명국이 있던 특수부대에서 저질렀다는 증언도 여기 들어 있다. 두 분 모두에게 심심한 감사를 드린다. 이 인터뷰 전문은 금년 3월 22일 작성된 것이지만 필자(지만원)는 4개월 후인 7월 20일에야 획득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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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광주사태에 남파 되었던 북한군 특전사의 증언

글쓴이: 이원명(탈북자) 

구술인: 김명국(가명, 5.18광주에 왔던 북한특수군)

2012년 3월 22일

 

필자(이원명)의 머리말

1980년 5월 광주 사태현장에 파견 되었던 전 북한 조선노동당 중앙당연락소(남파 간첩 훈련소) 전투원을 인터뷰 하다. 

아래 내용의 인터뷰를 진행한 이 사람(이원명)은 탈북자의 한사람으로서 대한민국에 입국하여 수년을 살아오는 과정에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복잡하고 싸움 잦을 날 없는 정치 현장을 보곤 한다. 이런 일들은 나에게 거짓과 진실에 대한 생각을 그 어느 때 보다 많이 하게 된다. 

필자(이원명)는 북한정권의 반인민적이며 반통일적인 정책에 환멸을 느끼고 더는 그 땅에서 살수 없어 탈북을 단행하였다. 북한독재 정권에 추종하는 남한의 좌파세력의 불순한 정치적인 야욕으로 이루어진 황당한 모략사건들이 날조되어 진실이 오도 되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가 없다. 역사에는 기록될 사변과 같은 사건이 거짓으로 조작되었던 일이 수 없이 많다. 허나 과학적인 수사기법이 날로 발전하여 수천년 전의 역사도 낱낱이 밝혀지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백주에 수백명의 남파간첩들이 광주거리를 활보하며 수많은 인명을 살상하고 전차를 몰고 시가전을 벌렸었다. 이런 특대형 범죄행위를 당사자인 남한 정권은 알려지는 것이 두려워 진실을 덮어버리는 이 나라 정치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변기통의 물을 떠 먹은 기분’이다. 역사를 부정하고 국민을 기만하는 괴이한 현상이 법치국가라고 하는 대한민국에서 30년 넘게 활개를 치고 있으니 ‘기가 막힐 노릇’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5.18광주사태를 계기로 남한을 전복하려한 북한정권의 침략적인 기도를 짓 부셔 버리고 반란세력을 진압하여 대한민국을 사수한 애국적인 국군 장병들이 살인자로 낙인찍히는 현실을 보면서 황당함을 감출 수 없다. 나라를 지키려고 했던 사람들이 감옥에 끌려가 법정에서 재판을 받는 지구촌 역사에 두 번 다시 없을 괴이한 어릿 광대와 같은 놀음에 기가 막힐 따름이다.

대한민국 국민과 애국세력은 북한정권의 지령에 따라 5.18광주사태를 일으키고 대한민국을 전복하려한 민족 반역의 무리들을 찾아내어 철저히 징벌하여야 한다. 이 길만이 더럽혀진 대한민국의 정치사를 회복하는 길이며 억울하게 북한군의 총에 맞아 죽어간 광주의 영혼들을 위로하는 길이라고 본다.

필자는 그 당시 북한군 최고사령관 김일성의 명령을 받고 북한 인민군으로 광주사태현장에 침투하였던 당사자를 찾아 낼 것을 결심하고 애를 써 왔다.

광주사태에 남파되어 북한 김일성의 지시를 수행하였던 북한군 특전사 대원의 증언을 국민들에게 공개하는 길만이 민주화의 탈을 쓴 반역 무리들의 반민족 역적행위를 만천하에 밝힐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하였다.

수년 간 그 행적을 찾아 오늘에 이루는 중요한 사실을 국민들에게 알리게 되어 다행으로 생각한다. 대한민국의 역사는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애국적인 국민들의 노력에 의하여 지켜지고 발전하여 왔다. 이 기회에 국민들 자신이 5.18광주사태의 진실여부를 올바로 판단하고 결정을 내리어 잘못되고 얼룩진 대한민국의 역사를 바로 잡으며 반역의 무리들을 역사의 심판장에 끌어내어 그 죄 값을 물어야할 것이다.

이 글을 본명의 이름으로 내지 못한다는 사죄의 말씀드린다 한 것은 북한 김정일이 자신의 범죄 행적과 북한 정권의 반인륜적인 진실을 세상에 알리는 애국적이며 양심적인 탈북민들에 대하여 보복행위를 일삼고 있기 때문이다. 남한에 있는 탈북민들은 다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탈북민의 이름을 알면 북한에 있는 남한 탈북민들의 가족과 친척들을 찾아내어 처형하곤 한다. 이런 파쑈적인 범죄행위를 거리 낌 없이 감행함으로 죄스러우나 본명을 밝힐 수 없다는 것을 양해하여 주시기를 필자는 밝히는 바이다. 

5.18 광주 사태 참가자인 김명국(가명)이 증언하는 북한조선인민군 부대의 명칭과 사건 연월일, 참가자 이름 등은 모두 사실이다. 다만 본인의 요구에 따라 당사자의 이름은 가명을 쓰기로 한다.

그이(김명국) 고향은 함경북도 회령시 ○○○리 이다. 대한민국에는 2006년 7월에 입국하였다. 광주 사태참가자 본 당사자와의 인터뷰는 본인(이원명)이 그의 집에 찾아가 하였다. 그의 집은 서울 지하철로 1시간 30분가량 가는 성남 분당의 지하철역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살고 있다. 그는 북한회령에서 나와 한 고장 사람임으로 이미 전에 친분 관계가 두터웠다. 필자가 얼마 전에야 이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그가 5.18 광주사태에 참가한 사실을 숨겨왔기 때문이다.

5.18 광주사태 당시 김일성의 지령을 받고 중앙당 연락소 성원으로 남한에 침투하여 북한군 특수작전에 참가하였던 당사자와 인터뷰 한 내용을 아래에 그대로 공개한다. 

광주사태에 북한군 특전사로 파견되어 활동한 김명국의 증언

한반도의 정치사에 깊은 상처를 남긴 5.18광주사태에 대하여 아직도 많은 말들이 오가고 있는 것을 목격하면서 한국이라고 하는 이 나라 정치사가 얼마나 어지러운가를 다시 한 번 보게 된다. 나는 북한군 특전사로 1980년 8월 광주사태에 남파되었던 사람으로 내가 보고, 듣고, 느낀 실지 사실을 인터뷰를 통하여 밝히려 한다.

5.18 광주사태가 자신들의 정치적인 야욕의 실현을 위해서라면 국민을 기만하며 진실을 오도 하는 것도 서슴치 않는 남한의 일부 정치 세력의 불순한 목적으로 악용되는 것이 참으로 가슴 아플 뿐이다.  

5.18 광주사태 당시 북한군 최고 사령관이었던 김일성의 전투명령을 받고 중앙당연락소(남파 간첩훈련소) 전투원으로 남한에 침투되었다. 대한민국을 전복하려 했던 남한 해방작전이라고 할 수 있는 광주사태의 참가자인 나의 증언이 잘못된 광주사태의 진실을 밝히고 역사를 바로 잡는데 도움 되기 바랄 뿐이다.

 

질문: “북한에서 탈북하게 된 동기가 무엇이에요?”

대답: “동생도 알다시피 회령에서 국토 부 기관 책임자면 권한이 막강하지 않나.

군대에서 세운 공로가 많지, 중요한 특수병중 지휘관을 했지, 더구나 영예군이니까 제대 때 중앙당에서 배치를 잘 해주더구나. 내 동생이 2002년도에 중국에 들어가 있었어. 나하고 잘 아는 25살짜리 친구의 딸을 동생이 있는 중국에 두만강으로 몰래 도강시켜 들여보낸 것이 발단이 되었다. 그런데 일이 안 될래서 그런지 그 여자 애가 중국 길림성 용정시 거리를 나다니다가 중국 공안국 애들한테 붙잡혀 나왔어.

회령 보위부에서 누가 들여보냈는지 대라고 족치니까 내가 보내 주었다고 말해서 직위에서 해임 철직 되고 출당까지 됐다. 가족추방까지 제기됐는데 회령시 당 책임적인 간부가 회령시 보위부에다 ‘그 사람 국가 공로자인데 한번만 봐주라고 해서 겨우 사건이 무마되었다.

두 번째 사건은 손대지 말아야 하는데 회령 강하천 소장의 딸이 이미 전에 몰래 들어가 중국에서 살고 있었는데 중국 조선족 남편과 함께 두만강으로 부모네 집에 나왔다 들어가는 것을 내가 도와주었댔어. 그런데 그 애 집에서 돈 문제로 싸움이 붙어가지고 동네방네 소리나 보위부까지 신고되었다.

그 여자애가 특수명예군인으로 ‘하반신 마비’인데다 북한에서 사회적으로 관심이 대단히 많아 잘 알려진 여자애니까 회령시 당에서 이 사건의 관련자들을 무조건 다 잡아 처리하라고 지시가 있었다. 그 바람에 내가 이번에 걸리면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가겠는데 어찌할 도리가 없지 않나. 그래 중국으로 두만강을 건너 탈북하게 된 거야.

질문: “한국에 와서 한번도 5.18 광주사태 당시 남한에 형님이 내려 왔었다는 소리를 한 번도 말 한 적이 없어요?

대답: 동생도 잘 알겠지만 북에서 온 사람들이 대한민국에 입국하면 대성공사에서 조사를 하지 않나. 이미 전에 여동생들이 한국에 먼저 오면서 대성공사 조사과정에 내가 5.18광주 사건 당시 남한테 북한대남 연락소 전투원으로 내려 왔었다는 것을 말했더구나. 대성공사에서 그에 대해 물어 보길래 내가 남한테 내려온 것이 사실이다 했지. 내가 광주사건에 참가하였다는 말이 나면 남한 사회가 복잡해지는 것을 바라지 않기 때문에 공개하지 말 것을 부탁했댔어.

그런데 보라. 남한에서 좌파들이 마치 자기들이 남한의 민주화를 이루어 낸 것처럼 떠들고 광주봉기를 민주화운동처럼 선전하고 있는 것을 보면 어처구니가 없다. 북한하고 손잡고 정부전복을 꾀한 사람들이 국가 유공자 대우를 받고 있는데 이거야 완전한 날조가 아니고 뭐야. 그래 보다 못해 진실을 밝혀야겠다는 생각에서 동생한테 이야기 하는 거야.

질문: 광주 사건에 앞서 명국형님이 북한인민군의 어떤 부대에서 복무하였는지부터 간단한 이력을 이야기 하여 주세요.

대답: “고등중학교16살 때 중앙당 5과에 가는 사람들 신체검사한다면서 청진 도당 청사객실에서 1977년 8월 24일 신체검사와 최종담화를 중앙당에서 내려온 사람들하고 하였어. 나는 중앙당 5과에 간다는 것을 그때 그 사람들이 말을 하여서 알았다. 77년 8월 26일 평양시 순안구역 구서리 중앙당 대남 연락소에 입대하였어. 명칭은 112훈련소(아동훈련소)이야. 순안구역 구서리 라는 곳은 평성과 순안구역의 경계선상에 놓여있어. 112훈련소의 위치를 보면 산세가 험하고 앞뒤 옆이 다 산으로 들러 막혀있는 곳이야. 우리 훈련소에서 얼마 멀지 않은 곳에 ‘자모산’ 이라는 곳이 있는데 김일성의 별장이 있다는 것을 후에 알았어.

 

질문: 훈련소에서 훈련은 어떤 훈련을 많이 받았어요?

대답: “우리는 단위로 구성되었는데 한 개 조가 10명씩이었는데 여자들도 배속되어 훈련을 함께 받았어. 주로 격술, 운전기재 다루는 법(땅 위에서 굴러가는 것은 다 배웠어), 산악훈련, 각종무기 다루는 법(비행기, 헬리콥터, 전차, 장갑차와 저격무기들) 특히 적군 무기 다루는 법을 많이 하였다. 낙하훈련을 많이 하였는데 낙하하면서 대원들이 다리를 많이 다치곤 하였다.

 

질문: 그 때 훈련을 함께 받으면서 아는 조원들 이름 기억나면 말씀해 주세요?

대답: 우린 규정상 이름을 부르지 못하게 되어 있어. 번호를 부르게 되어 있다.

예로들면 153번이라고 하면 1은 훈련소 번호이고 5는 타격조 번호이며 3은 본인 번호이다. 다른 조 대원들하고는 절대로 말을 하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훈련소에 미국제 지프차가 60대 정도 있었는데 운전기재 훈련할 때는 주로 구서리 강기슭에서 하였다. 내가 우리 조에서 이름이 기억나는 것은 조장 이름이야. 조장이 여자였는데 이름이 홍인옥이고 고향은 함경북도 웅기(지금의 선봉군)랬어. 그때 나이가 16살이었는데 7살 때부터 훈련소에 입대하여 중학교 교육과정을 함께 받았다 그래더군. 아버지, 어머니 없는 고아라고 했어. 대남 연락소 아동훈련소에는 주로 고아들이 많이 있었다.

 

질문: 아동훈련소는 사명이 무엇이에요?

대답: 한마디로 말하면 중앙당 연락소 후보지나 같다고 봐야 한다. 중앙당 연락소라는 곳이 너도 알다시피 남한이나 해외에 간첩들을 파견하는 곳이 아니야. 아동훈련소는 개성연락소, 원산연락소, 해주연락소, 청진연락소 등에서 인원이 요구되면 보충하는 곳이라고 보면 정확할 게다. 어떤 때는 지도와 나침반만 주면서 야밤에 깊은 산골짜기에 있는 죽은 사람 묘를 파고 그 안의 시체에서 쪽지 같은 것을 찾아오라고 시킬 때는 등골이 오싹하지 뭐.

질문: 기차 같은 것은 몰아 보셨어요?

대답: 전기 기관차, 증기 기관차를 운전하는 법을 배웠다. 그 훈련 할 때는 개천에서 순천으로 다니는 증기 기관차와 전기 기관차를 잡아타고 탈출하는 훈련을 했었다. 그렇게 1년 넘게 훈련을 받다가 평양시 서포구역 대양리에 있는 조선 노동당 중앙당 연락소(일명 대남 연락소) 2처 전투정찰에 배치되었다.

질문: 중앙당 연락소 2처 전투정찰은 무엇을 하는 부대요?

대답: 부대 명칭은 조선인민군1010군부대야. 왜 1010군부대라고 부대이름을 달았는가하면 조선노동당창건 날짜를 따서 부대 이름을 그렇게 불렀어. 북한에 대남 연락소가 몇 개 되는데 1010군부대는 중앙당 직속 연락소야. 1010군부대는 전투정찰과 여성타격대(목란 꽃 중대)가 있었다.

질문: 중앙당 연락소에 1처와 2처가 있다고 했는데 서로 다른 점이 무엇인지 말씀해 주세요.  

대답: “내가 배속된 2처 전투정찰은 1처의 전투 진입을 보장해주고 신변호위를 담당해주는 것이 기본 임무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1처 사람들이 남한 목적지까지 호위 사업을 맡아 데려다주고 임무를 마치고 북으로 들어오는 1처 사람들을 무사히 데려오는 안내자 역할을 한다.

1처는 남한에 침투하여 한국 국적을 가지고 국가의 중요 직책들에 잠입해 있으면서 각종 기밀자료들을 수집하고 남한의 반정부 음모 활동을 벌리는 첩자들을 파견하는 기관이야. 여성들은 주로 남파되어 남조선의 정부요인이라든가 군부 장성 급들, 민주주의 인사들, 기업가들과 혼인관계를 맺고 그들을 북한 쪽으로 돌려 세우는 사업과 외국에 전투정찰은 임무가 서로 다르다. 예로하면 육상 조와 해상 조로 나뉘어 1처의 전투임무를 보장하는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미얀마 아웅산 폭파사건, 1977년 가을 남한 이리역 폭파사건이 우리 연락소에서 조직한 거야. 이리역 폭파 사건 때 3개 조가 파견 되었는데 우리 조장(이름 리상국)의 조만 살아남고 나머지 2개조는 폭약 실은 열차 다이야가 터지면서 미처 대피를 하지 못하여 죽었다고 조장이 말하더라는 것이다.

 

질문: 5.18광주 사건 때 북한에서 임무를 어떻게 받고 나왔는지 설명 좀 해주세요

대답: 1980년 5월 18일 날 야외 훈련하였는데 다 철수하라고 해서 부대로 들어오게 되었다. 5월 19일 날 조장, 부조장들이 오전에 어디 갔다 오후에 돌아 왔는데 훈련을 나가야 하기 때문에 준비를 하라는 거야. 훈련장구류라는 것이 총탄300발, 수류탄2발, 권총과 카빈총1정, 단도, 포승 끈, 구급치료 약 이었다. 식량은 미시가루 6일분, 말린건. 쌀 3일분(물에 타서 먹을 수 있게 준비된 것), 영양알약1달 분치를 준비하여 한국에서 지금 사용하는 등산용 배낭에 넣었다.

피복은 조장이 물자 창고에 가서 타온 것을 입었다. 위에는 잠바형식(색상은 여러 가지), 바지는 미색으로 된 것이고 신발은 남한 운동화 같은 신을 신었다. 그 날 오후 4시 경에 대양리에서 50명의 전투인원이 북한에서 만든 갱생 지프차로 출발하였었다. 그러니까 그게 내가 19살 때이다. 부대에서 내가 제일 어리니까 우리 조장이랑 나보고 다 ‘막둥이, 막둥이’ 해댔어.

질문: 그날 떠날 때 조장이라든가 다른 지휘관들이 남한이나 어디에 간다는 말 한 것 없어요?

대답: 전혀 남한에 온다는 것을 몰랐어. 부대 규정상 우린 어디 훈련 나간다고 하면 조장이 가는 데로 따라 가면 되는 거야. 절대 알려 주지 않아.

 

 

질문: 5.18광주 사건 때 남한에 침투된 북한군의 인원 수를 알고 있어요?”

 

대답: 훗날 총화 때 알았는데 200명 정도 나왔다가 거의 다 죽고 살아 돌아 온 사람이 17명 정도 밖에 안 된다고 파견대장이 말하더라. 우리 파견대 대장 이름이 ‘문제심’이야. 현재 ‘문제심’은 북한 인민군 무력부 부부장으로 승진되어 일 하고 있어. 1분견대, 2분견대하고 대장 직속 부대가 있었는데 우리조가 직속부대에서 대장의 호위를 맡았댔어. 1개 분견대 안에 2개 타격대와 직속으로 나뉘어져 있다. 북한에 들어가서 총화 끝에 분견대장들은 교도지도국 작전국에 소환(출세)되어 갔다는 소리를 들었다. 한 개 타격대가 50명씩이니까, 4개 타격대에다 직속부대까지 합하여 남한에 나온 인원수가 200명 정도는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야.

질문: 그럼 남한으로 떠날 때 200명이 함께 떠났어요?

대답: 아니야, 우리 떠날 때는 대장이랑 함께 20명이 떠나고 나머지 사람들은 우리 보다 먼저 떠난 것 같아. 후에 조장이랑 지휘관들이 말하는 것 들으려니까 우리 먼저 남한에 침투된 상태인 것으로 말하더라. 우리 조는 12명이랬어. 직속부대에는 3개조가 있었는데 우리조가 12명이고 3조는 15명, 나머지 사람들은 16정찰에서 배속된 남한 전문가들이었다.

질문: 조장이랑 조에 함께 있던 사람들에 대해서 알고 있는 대로 말해주세요?

대답: 우리 조장이름이 ‘리상국‘ 이었는데 나이는 23살이고 고향은 함경남도, 함주군 사람이야. 아버지가 그때 함주군 인민병원 초급당 비서라고 하던 말이 생각난다. 

군사칭호는 중위였어. 날 끔찍이 사랑해주었다. 우리 부조장의 이름은 ‘한광호’인데 나이는 22살이고 군사칭호는 소위였다. 고향은 어디라고 했는지 생각이 잘 나지 않는다. 조 성원들의 이름이 생각나는 사람은 ‘김일룡’(21), ‘최길산’(20), ‘황보석’(21), ‘한철수’(21)인데 훈련 나가게 되면 나랑 항상 같이 숙식을 하였기 때문에 생각나지. 다른 애들은 30년 전의 일이니까 잘 생각이 나지 않아. 그 때 나는 군사 칭호가 상사였어.” 

질문: 남한으로 침투하던 때의 상황을 자세히 이야기 해주세요

대답: 5월 19일 오후 4시경에 대양리에서 갱생 트럭 6대에 직속 부대 50명 인원이 나누어 타고 떠났어. 우리가 도착한 곳이 내가 그때 듣기로는 황해남도 장연군 장산곶 바닷가 인데 어슬 어슬 한때니까 아마도 저녁9시 경이 된 것 같더라. 바다 쪽으로 보니까 부두에 배가 2척이 있더라.

대장이 조별로 배에 오르라면서 오르는 순서대로 갑판 밑에 다 내려가라고 지시해서 모두 갑판 밑에 내려갔다. 복도가 가운데 있고 양 옆으로 침실처럼 되어 있더라 

조장들이 먼저 침실 점검을 하고 쉬라고 하면서 하는 말이 이제부터는 군복을 벗고 각자에게 있는 사민 복을 입으시오! 라는 것 이었다. 조장은 조 성원들에게 자리를 잡아주고는 갑판으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우리에게 다 배에서 내리라는 명령이 떨어져 바다에 뛰어 들어 보니 물이 가슴높이 까지 차오르는 것이었다. 30m 정도 되게 기슭으로 바다 물을 가르며 나와 사방을 둘러보니 무인 지경 같아 보였어. 그날이 21일 새벽 2시경으로 기억이 난다. 우리가 배를 타서 2일간 바다에 있던 것이다.

 

 

질문: 남한에 내려오면서 탔던 배가 어떤 배였는지 좀 말해주세요?

대답: 우리가 탔던 배는 일반 남한의 고기 배와 꼭 같아. 길이가 20m쯤 되었을 거야. 여느 때는 일반 배처럼 고기잡이를 하는데 추진기가 4개 달린 배야. 상황이 발생하면 추진기 4개가 다 가동하는데 비행기처럼 속도가 빠르고 자체 폭파하게 되어 있어. 하루 종일 갑판 밑에서 있으려니까 낮이 가는지 밤이 가는지 모르겠더라.

 

질문: 그 때 바닷가에 내렸을 때 인상적이라든가 기억에 남는 것이 없었어요?

대답: 캄캄하니까 잘 모르겠던데 바다 주변에 울퉁, 불퉁한 바위가 많던 것이 지금도 기억이나. 바다 주변에서 올라와 2명~3명씩 2시간 정도 은폐해 있었는데 대장이 조장들을 부르더란 말이야. 그 때 나는 대장 호위를 맡았으니까 대장 옆에 얼마 멀리 떨어져 있지 않으니까 알 수 있었는데 사람 몇 명이 대장한테 와서 자기들이 남한에서 이룩한 성과 부분을 보고 하는 것 같더라. 그 들의 말을 들으니 무기고를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하였다는 것과 함께 트럭, 장갑차들을 노획하였다는 말을 하는 것이었다. 후에 생각해 보니까 그 사람들이 남한 쪽에서 마중 나온 길 안내자들인 것 같아.

한참 대장이랑 조장들이랑 무슨 토의를 하는지 있다가 조장이 우리한테 와서 ‘모여, 이제부터 조원들은 전투행동으로 넘어간다, 여기는 남조선이니 우리가 목표물에 도착할 때까지 최대한 조심히 행군한다.’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우리의 전투행동이라고 할 때는 북한에서 강습 받기는 행군도중 노상에서 만나는 그 누구라도 없애 버리게 되어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무조건 처리해버리라(죽여서 땅에 묻어버리라)는 것이 지휘부의 명령이다. 행적이 밀고 될까봐 그러는 거야. 그때야 내가 남조선이라는데 왔다는 것을 알았어. 조장이 남조선에 왔다니까 갑자기 긴장해지더라....”

질문: 광주에는 언제 들어갔어요?

 

대답: 우리가 모여 있던 장소를 출발한 시간이 밤 2시경 됬어. 출발! 명령이 떨어져서 행군했는데 가면서 보니까 대 도로를 지나가고 과일밭, 야산들을 지나가던 생각이 나. 우리 조는 대장을 호위하는 임무를 맡았으니까 대장하고 직속 부대가 함께 출발하였는데 각 조별로 움직였다.

목적지에 도착하였다고 하여 보니 도시 주변에 있는 야산이었는데 가까이 보이는 건물은 그리 높지 않은 2층, 3층 건물들과 땅, 집들이 보이더라. 멀리 보이는 데는 고층건물들이 어렴풋이 보이던 것이 생각난다. 그 때 조장이 ‘여기가 남조선 광주라는 곳인데 지금 광주에서는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 우리의 임무는 전투를 지원하기 위하여 왔다.’ 는 내용으로 말하더라.

식사는 이미 배에서 있던 물에다 건 쌀을 물에 불 구어 밥을 만든 것을 가지고 떠나 도착하여 아침을 먹었다. 식사를 끝내고 나니까 조장이 2~3명씩 조별로 은폐하라는 거야. 우린 은폐해 있으면서 배에서 내릴 때 물에 젖었던 복장 정리를 다시 했다. 조장은 우리에게 임무를 주고 대장에게 갔는지 보이지 않더라. 그 때 내 생각인데 우리 조가 은폐하고 있는 기간 조장들하고 대장이 정황을 요해하고 작전토의를 하느라고해서인지 다음날인 23일 오전 10시경까지 나타나지 않더라. 조장이 오전 10시경에 ‘조 전체 모이라’ 라고 하더니 ‘이제부터 전투에 진입한다.’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은폐했던 곳을 떠나 도시 가운데로 들어갔어. 오후 4시까지 2~3명씩 조를 무어 시내를 한번 돌았는데 지금 기어나는 것은 큰 건물 주변에 모래주머니로 쌓아놓은 바리케이트가 있었어. 바리케이트 위에는 총들이 보였고 기관총이 있더라.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 것은 바리케이트 주변에 일반 시민들도 있고 특히는 얼룩얼룩한 개구리 복장을 한 사람들이 많이 있던 것이 기억에 잊혀 지지 않는다.

그 때 나는 ‘이 건물이 봉기군 지휘부가 있는 건물이 아니겠는가?’ 하고 생각이 들더라. 우리 대장이 그 건물에 거의 도착하니까 안에서 3명의 머리를 장발 기른 시민 복장차림의 사람들이 뛰어 나와 대장을 맞이하여 안으로 함께 들어가더라. 마중 나온 사람들은 이미 대장을 알고 있더라.

질문: 대장이랑 그 안에 들어가 누구랑 만나고 무슨 일을 했는지 모르겠어요?

대답: 우리는 대장의 호위를 맞은 사람들인데 조장이 가면 가고 서라면 서는 역할밖에 못해. 조장 조가 대장하고 건물 안으로 같이 들어갔었어. 우린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을 지켜보면서 있었다.대장이 밖에 나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대장이랑 밖으로 나와 조장이 ‘철수하라’고 해서 광주시가 내려다보이는 야산에 올라왔는데 전날 있었던 산이 아니고 다른 지점이더라. 

저녁 4시경에 조장이 오라고해서 한 장소에 가니 ‘오늘 수고하는데 빵이나 먹으라’ 며 음식 꾸러미를 우리에게 주길래 난생처음 빵이랑 한국음식을 먹어 봤다

우리야 한 달 치면 거의 전투식량으로 살던 사람들인데 어쩌다 맛있는 음식을 먹어본 게 잊혀 지지 않는다.

 철수해서 산에 있을 때 대장한테 여러 명의 사람들이 찾아 왔었는데 내 보기에는 이미 전에 파견된 북한군인들 같은 느낌 이었어. 무슨 작전토의 같은 것을 오래 했는데 말투도 그렇고...우리 조는 은폐한 상태에서 밤을 보내고 25일 다음날 오전 10시 경에 시내 쪽에 있는 도로에 나갔던 생각이 난다. 그 때 보니까 광주 쪽으로 들어오는 도로에 바리케이트를 쌓아놓았는데 그 위에 총들을 기대놓았더구나. 대장이 바리켓트 쪽으로 다가가서 그쪽에 있는 사람들하고 악수하면서 무슨 말을 주고받던 일이 눈에 선하다.

바리켓트 300m 정도 넘어로 보니까 남조선 국군병사들이 움직이는 것이 보였는데 길옆에 군용트럭이 한 줄로 길게 서있는 것이 보이더라, 우리 대장이 다른 곳으로 다니면서 사람들을 여러 번 만났는데 가는 곳 마다 바리켓트를 쌓아놓고 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국군병사들하고 대치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훗날 생각해 보니까 대장이 다니면서 작전 지휘를 하는 것 같아.

그 날 (25일) 저녁 5시경에 조장이 우리를 모이라고 하더니 전투정황을 설명해 주더라. 조장이 하는 말이 ‘우리 쪽(북한군)이 손실이 많다. 이제부터 어려운 싸움이 되겠는데 목숨 바칠 각오를 가져라’고 말 하더라.’ 그러면서 ‘지금 형편을 보니 우리가 살아 돌아 갈 수도 있고 잘못하면 여기서 싸우다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광주 봉기자들의 대열에서 동요가 일어나고 싸움을 포기하고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점점 상황이 불리하게 되어 가고 있는데 함께 움직이지 못하고 흩어 질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모두가 자기 맡은 임무대로 하여야 한다. 우리는 북한에 두고 온 부모, 형제들을 생각해서라도 잡히거나 변절자가 되지 말자.’ 는 식으로 오래 말하더라.

 

그러면서 말하기를 ‘우리 조는 대장의 호위를 맡았으니까 싸움은 하지 않았는데 다른 조들은 싸움에서 많이 희생 되었다.’ ‘우리가 다 죽더라도 대장만은 지켜야 한다. 대장이 잘못되면 우리도 다 잘못된다.’ 며 마지막 유언 같은 말을 남기는 작별인사를 하는 것 같았다. 조장이 하는 말이 우리의 행동은 2단계 넘어간다고 하였다.

 질문: 1단계는 무엇이고 2단계는 무슨 말이에요?

대답: 1단계는 한마디로 시위군중하고 협력하여 광주 봉기를 남한전체에 확대하는 것이고 2단계는 무장투쟁으로 넘어간다는 것이다. 2단계라는 말을 해석하면 남조선에 제 2전선을 형성하여 북한에서 밀고 내려오는 기본부대와 협동작전을 하여 남조선을 통일하는 것이라고 조장이 말하더라. 그 날도 조장이 어디서 가져왔는지 이 밥에 고기반찬이랑 먹던 생각이 난다. 유별나게 맛있던 반찬은 고등어 같은 반찬이야. 정말 맛있게 먹었어.

그 때 대장의 옆에서 각지에 파견되었던 조장들이 보고 하는 말을 들으니 무기고를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하였다는 것과 함께 트럭, 장갑차들을 노획하였다는 성과 보고를 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그 때 광주 쪽의 상공에서는 헬리콥터가 여러 번 순회 하면서 봉기군들을 향해 투항하라는 식의 방송을 하는 것이 멀리서 보였다.

26일과 27일 새벽2시 까지는 있던 장소에서 머물면서 조장의 다음 지시를 기다렸다. 조장이 숨이 차게 뛰어 와서 하는 말이 ‘긴급기동을 하여야 한다.’ 며 출발명령을 내리는 것이었다. 그 때 조장이 하는 말이 ‘이제부터 경산 산줄기를 따라 들어가야 한다.’ 며 하던 말이 생각난다. 행군도중에 부조장이 ‘이제부터 우리는 유격전을 벌려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우리조가 목적지에 도착하여 보니 아침6시경이었는데 무기를 휴대한 사람들이 우리가 있는 곳을 지나 산속으로 들어가고 뒤에서는 총소리가 자지러지게 나는 것이었다. 대장이 산으로 들어오는 봉기군을 마지막까지 맞이하여야 한다면서 있다나니까 국군이 갑자기 나타나는 바람에 총격전이 벌어지게 되었어.

 

그 때 우리 쪽에서 국군을 먼저 발견하였는데 우리가 위치한 200미터 정도 되는 곳에서 봉기군을 포위하려 들어오던 특전사 부대원들이 수십명 정도 되게 불의에 나타나자 조장이 사격명령을 내렸다. ‘사격하라’ 소리와 함께 요란한 총성이 산골짜기를 메웠어.나도 그때 3명의 국군을 쐈는데 쓰러지는 것을 보았다. 그 때 쓰러진 국군 병사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내가 속해있던 부조장이 책임진 6명(엄호조)은 국군과 그냥 총격전을 벌이며 견제하였고 조장이 데리고 있는 6명이 대장을 호위하여 산속으로 들어갔다. 5분후에 우리도 골짜기로 철수하였다. 우리가 철수하면서 보니 산 아래 쪽에서는 총소리가 자지러지게 나는 것을 보니 시후에 조장이 말하는 것을 보니 ‘우리 조와 맞다들었던 국군이 11공수 특전사부대’ 라고 하는 것이었다. ‘특전사가 공중으로 광주시내 중심에 투입되어 봉기자들을 진압하는 바람에 실패하였다.’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광주 봉기가 실패하게 된 원인은 시위대가 자체 해산되면서부터 였다는 것이다. 우리가 대장이 있는 데까지 산으로 올라가는데 시위 봉기자들이 총을 버리고 내려오는 것이었다. 다른 조들과 만나게 되어 물어보니 ‘자기네들은 싸움을 포기하고 내려가겠다.’며 간다는 것이었다. 한 쪽에서는 북한과 무전연락을 하며 다음 지시를 기다리면서 산으로 들어갔어. 우리는 대장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는데 산 아래에서는 총소리가 그냥 나고 있더라. 대장이 돌아와 행군명령을 내렸는데 시간을 물어보니 저녁9시 경이었다. 그 날이 1980년 5월 27일이야.

 

다른 조들과 헤어지고 우리는 대장과 함께 13명의 인원으로 산봉우리 아래쪽으로 가로질러 가면서 타고 나갔었다. 주민가옥에는 절대 들어갈 수 없었으므로 먹고 자는 것은 행군 도중에 잠깐 1~2시간씩 풀숲에 은폐하여 쪽잠을 자곤 하였다. 5월 30일 날 새벽에 우리조가 ‘문경고개’ 근처에서 행군할 때이다. 다른 방향으로 나갔던 부조장이 책임진 조가 돌아왔어.

 

아침밥을 먹을 때 조장이 지도를 보는 곳으로 부조장이 다가와 ‘01번 동지, 우리가 민가에 너무 가까이에서 행군하지 않습니까?’ ‘아니야, 정확히 우린 8부 능선을 따라 가고 있어.’ ‘그런데 산에 웬 여자 아이가 있습니까?’ ... ...그래 처리해 버렸습니다. ‘그래? 잘 했어, 행군하면서 최대한 주의하라. 남한 거마리들에게 발각되면 끝장이야.’ (8부 능선이란? : 산 높이를 10등분 하였을 때 8등분에 해당하는 높이를 말한다. 남한 거마리 들이란? : 한국 국군 수색대를 보고 하는 말이다.)

 

 

휴전선에 도착한 때가 저녁 11시경이라고 생각된다. 그 때야 나는 우리가 휴전선에 와있다는 것과 북한으로 철수해서 들어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일체 조장의 지시대로만 움직이고 말을 절대 물어보거나 말을 할 수가 없었으므로 그럴 수밖에 없었다. 도착하여 2시간 정도 기다리니 무력부 정찰국 소속 대원들과 3조 성원들 몇 명이 우리 조와 합류하였다. 휴전선 지뢰밭과 철조망은 정찰국 성원들이 앞서나가면서 해제하여 길을 개척하였다. 휴전선을 넘어서 보니 6월 5일 아침 9시 경이었는데 지역을 알아보니 북한 강원도 판교군 지하리라는 것이었다.

 

 

한참 걸어서 가고 있는데 난데없이 떨어져 터지면서 우리 부조장(한광호)과 조원(017번)이 포탄에 맞아 즉사하였다. 사방에서 마구 포탄이 터지 길래 우리는 남한 국군의 포위에 든 것으로 알았었다. 대장이 명령하기를 모여 있으면 포탄에 맞아 다 죽을 수 있기 때문에 시체도 못 건지니 분산해서 은폐하라고 소리치는 것이었다. 대장이 말하는 것을 보니 분명히 북한에 들어왔는데 뭐가 잘못된 것 같다며 쌍안경을 들고 사방을 둘러보는 것이었다.

 

 

대장이 뭐라고 고래고래 소리치자 저 멀리서 대여섯 명의 군인들이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가까이 오는 군관들을 보니 인민군 상좌, 대좌 등 고급 군관들이었다. 대장과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니 우리조가 북한 지하리에 있는 무력부포사격장에 들어와 있었고 그날 운이 없게도 북한군에서 새로 개발한 152mm 박격포 성능사격을 하는 날이라는 것이다. 그들과 함께 다친 사람이 없는가 찾아보니 부조장과 조원이 폭탄 파편에 맞아 죽어 있었다.

 

 

우리가 남한 국군 복을 입은 것을 보더니 북한 포사격장 책임자되는 사람이 우리 대장과 무슨 토의를 하는 것 같았다. 우리는 부조장과 조원의 시체를 가지고 부대까지 가려고 했는데 위에서 지시가 떨어졌다면서 이곳에 묻으라고 한다면서 시체들을 가지고 어디론가 떠나갔다. 대장은 떠날 때 정찰국 대원들과 함께 갔었다. 그 때부터 우리는 대장과 헤어져 더는 호위 사업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하도 정신없이 돌아치다가 대장이 떠나고 대열이 정돈 돼서야 내 다리가 쏘고 아파나 바지를 올리고 보니 무릎에서 피가 흐르는 것이었다. 조장이 와서 보더니 군용단도로 상처 난 곳을 후벼 냈는데 무릎에서 파편 조각이 나오는 것이었다. 조장은 우리가 가지고 다니던 휴대용 비상약품에서 외상 살균약을 상처에 쏟아 부어놓고 붕대를 동여매는 것이었다. 그 날 조원모두 휴식을 하였는데 휴식장소 주변에 묘지가 많던 것이 기억에 선하다.

 

 

다음날인 6월 6일 우리조원들은 부조장과 조원이 잘못 되어 모두 밥도 먹지 않고 정신 상태가 좋지 않아 인차 부대로 출발을 하지 못하였다. 오전 10시경에 출발하여 산속의 냇물이 흐르는 곳에서 모여 앉아 휴전선 너머 들어와서 첫 식사를 하였다. 그 때 내 다리의 무릎 상처가 부어오르고 송곳으로 찌르는 듯 아파나서 행군을 더 할 수 없게 되자 조장이 조원을 데리고 어디론가 다녀오더니 나에게 북한군 군복을 가지고 와서 입히는 것이었다. 그 날이 6월 9일 북한 사리원시에서 한참 떨어진 주변으로 생각된다.

 

 

조장이 가지고온 군복을 입어보니 소매가 등을 덮을 정도로 커 보이는 것이었다. 우리 조원들은 나를 보며 치료를 받으려 병원에 가야 한다며 헤어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산에서 내려와 보니 이미 전에 갱생 차(병원 차)가 도착하여 있었다. 조장이 차를 가지고 온 사람들과 이야기 하는 것을 보니 평안북도 선천 전상자병원에서 왔다고 소개하는 것이었다.

 

나와 헤어지면서 ‘평양에 올라가 전투임무 수행보고를 하고 꼭 시간을 내서 병원에 찾아가겠으니 가서 치료를 잘 받으라’ 고 하는 것이었다. 그해 10월30일 태천 군관학교 가는 날까지 병원 치료를 받았다.

 

 

광주봉기의 북한군 침투 총화는 6월 15일 김일성과 김정일의 직접적인 참석 하에 평양에서 하였다고 한다. 남한에 침투되었다 전사한 사람 모두에게는 공화국 영웅 칭호가 수여되었다. 분견대 대장 2명은 조선인민군 교도지도국(특수전 사령부)작전부에 승급 배치하였다고 한다. 김일성은 소좌급인 분견대장들에게는 대좌의 군사칭호를 수여하였다고 한다. 조장들은 7명이 살아 돌아 왔는데 각 군단부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상위급 군사칭호를 상좌로 승격시켜 배속하였다고 한다. 조장들 7명 모두 공화국 영웅 칭호를 수여 받았다고 한다.

 

 

이들 중에는 이미 전에 남한에서의 전투 공로로 하여 공화국영웅들이였는데 2중 3중 공화국영웅칭호를 받은 사람들이 여러 명이 되었다. 나는 이 모든 사실을 후에 병원에 찾아온 조장에서 듣게 되었다. 10월 9일경 나에게 중앙당 연락소 정치위원과 조장이 병원에 찾아 왔었다. 병원에 찾아온 조장을 보니 상좌의 계급장을 달고 있는 것이었다. 3중 공화국 영웅칭호를 받은 것이다.

 

 

정치위원이 그 때 나에게 하는 말이 광주봉기 참가로 하여 1010군부대가 인명손실이 크고 해산 명령을 하여 다른 곳에 있는 대남연락소들에 배속 되었다는 것이다. 전투 총화에서 김일성은 ‘평화 시기에 금싸라기처럼 귀중한 혁명동지들을 잃을 수 없다. 국가에서 수많은 투자를 하여 키운 귀중한 동지들이 희생된 것은 국가의 커다란 손실이다. 앞으로는 평화 시기에 남한에 침투하여 전투를 하지 않는 방향에서 하라.’ 며 명령을 하였다고 정치위원이 말하는 것이었다.

 

 

그 때 정치위원이 하는 말이 ‘내일 병원에서 행사가 있으니 참가하라’는 것이었다.

 

정치위원과 조장이 도착하는 날 나는 병원의 입원호실에서 청소 밀대로 방바닥을 청소 하고 있었다. 조장이 나에게 ‘치료는 어떻게 받고 있어?’라며 물어 보길래, ‘구급치료만 받은 상태입니다.’ 라고 대답하자 ‘뭐? 그게 정말이야?’ 라며 나의 다리에 감겨진 붕대를 풀고 자세히 보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병원 문을 열고 어디론가 나가는 것이었다. 그 날 우리 조장은 내가 아직까지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고 병원 초급당 비서를 찾아가 권총을 꺼내 그이 가슴팍에 겨누고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데 10일이 지나도록 치료를 해주지 않고 밀대 청소를 시키고 있어?’라며 야단을 쳤다는 것이다.

 

 

선천 무력부전상자 병원에는 군사임무 수행 중 사고로 다쳐 팔, 다리가 끊어진 사람이 차고 넘쳤으니 나의 경력내용을 모르는 병원에서는 그럴 만도 한 일이었다.

 

훈련에서 요구성이 강하고 일단 성이 나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성격의 소유자이나 대원들을 무척 사랑하고 인정이 많은 사람이다.

 

 

위의 이야기는 훗날 담당 간호원에게서 들어 알게 되었다. 다음날인 20일 아침 9시 경에 간호원이 2명이 담가 대를 들고 들어와서 앉으라는 것이었다. 당가에 앉아 병원회관으로 들어가니 전상자병원 직원들과 환자들 모두 모여 있는 것이었다. 나는 좌석 맨 앞자리에 담가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시간이 얼마 지나 주석단에 나오는 사람들을 보니 병원 원장과 초급당 비서, 우리 조장과 연락소 정치위원 등 여러 명이 나와 앉는 것이었다.

 

 

회의 시작을 알리는 것과 함께 사회자가 ‘위대한 수령님과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의 감사문을 전달하는 모임을 시작하겠습니다.’ ‘당중앙위원회 위임에 의하여 조선인민군 1010군부대 정치위원동지가 보고를 하겠습니다.’ 이어 정치위원이 주석단에 나오더니 ‘조선인민군 1010군부대 전투원 김명국 동지는 앞으로 나오시오!’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당가에 들리어 주석단으로 나갔다. 정치위원이 ‘조선인민군 1010군부대 전투원 김명국 동지는 1980년 5월 전투공로로 하여 조선로동당에 입당하였음을 선포합니다.’ 라며 조선로동당 당원증을 수여하였다.

당원증을 수여받고 내려가는 줄 알고 당가에 돌아앉는데 그냥 앉아있으라는 것이었다. 정치위원이 이어 ‘김명국 동지는 같은 전투공로로 하여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국기훈장1급, 자기 목숨을 바쳐 지휘관을 보위한 업적으로 하여 국기훈장1급을 수여합니다.’ 라며 국기훈장2개를 나의 앞 가슴왼쪽에 달아주는 것이었다. 그 때 땅과 하늘이 다 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날 모임이 끝나고 담가에 들리어 병동으로 들어가 보니 원래 내가 입원하고 있던 호실이 아닌 독방에 침대1개만 놓여있고 갖가지 시설이 잘 갖추어진 고급스러운 호실로 옮겨주는 것이었다. 조장과 정치위원이 그날 밤 나와 잠을 함께 잤다. 정치위원이 나에게 ‘1010군부대가 해산한 조건에서 병원 퇴원 후 집으로 가겠는가? 아니면 군사복무를 계속 하겠는가?’ 라고 묻는 것이었다.

 

 

집으로 가겠다고 하면 일반적으로 대학으로 가는 것을 의미하는 소리인 것이다.

 

나는 그때 정치위원에게 ‘군관이 되고 싶습니다.’ 라고 하자 정치위원은 나에게 ‘9월 아니면 10월에 다시 오겠으니 병 차도를 보고 군관학교에 보내주겠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훗날 10월 27일 이라고 생각되는데 정치위원이 나를 데리러 온 것이 아니라 태천군관학교(특수전 사령부 군관학교) 당위원회에서 군사칭호가 중좌인 사람이 나를 데리러 왔었다. 병원에서 태천군관학교에 떠나기 전 성대한 환송모임을 조직하여 주었다. 하여 나의 일생에서 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태천군관학교에 입학을 하게 되었다.

 

훗날 나는 ‘태천군관학교’에서 1년간 공부하다가 다리부상으로 인한 후유증으로 교육과정을 소화하기가 힘들어 훈련강도가 낮은 강건 종합군관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었다. 2년 후 북한군 교도지도국산하에서 지휘관으로 군사복무를 하게 되었다. 그 후 나는 군사훈련과정에 허리와 손이 심하게 다쳐 손가락을 절단하는데 까지 이르러 더는 군사복무를 할 수 없었으므로 군대에서 제대되어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질문: 북한 군부에서 5.18광주사건에 참가하였다가 사망한 군인들에 대한 묘비를 세웠다고 하던데 사실인지 말씀해 주세요.

 

 

대답: 사실이야. 북한 군부는 광주 사건에 침투하였다가 사망한 군인들의 이름이 적힌 묘비를 북한 평안남도 평원군 원하리에 세웠다. 일반적으로 묘비라는 것은 <죽은 사람의 이름과 죽은 날자, 죽은 원인> 적혀 있지 않나. 묘에 묻힌 사람이 없으니까 이름이나 날자, 원인 같은 것을 밝히지 않았다.

 

평원군 원하리에 적혀있는 묘비에는 사람의 시신이 없고 5.18광주 사건 때 남한에서 침투하였다가 남한 군인들과 전투에서 싸우다 죽어 북한으로 돌아오지 못하였으니까 이름만 적어 기념비처럼 세운 묘비야. 묘비에는 이름만 적혀 있고 ‘...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영웅 전사들을 조국은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다.’ 라는 내용의 글이 적혀 있다. 일반 사람들은 평원군 원하리에 있는 묘비가 무엇 때문에 죽은 군인들의 묘지인지 모르고 있어.

 

 

질문: 남한의 검찰과 경찰조사 기록 자료를 보면 경찰이 4명, 군인이 23명, 민간인이 166명이 광주사건당시 죽은 것으로 확인 됬어요. 신원 미 확인자가 12명이라고 조사기록에 나와 있어요. 북한에서 200명 정도에서 내려왔다 살아 돌아간 인원이 17명밖에 안된다고 하였는데 나머지 사람들은 어디에 갔다고 생각하세요?

 

대답: 나는 지휘관이 아니니까 그 내용은 잘 몰라. 대장을 호위하는 전투성원으로 조장이 지시를 주면 그것만 수행하였기 때문에 그 내용은 알 수가 없는 거야. 김일성이나 김정일은 5.18광주사건에 북한군을 침투시킨 조직자이니까 알겠지. 대남연락소 내부 규정에는 전우가 죽으면 흔적을 없애려고 땅에다 묻어 버려. 마지막 남는 사람은 붙잡히게 되면 자폭하게 되어 있어. 만약 전우가 부상당해 대오의 행군에 지장을 준다고 생각되면 죽여서 땅에 묻어버린다.

 

옷 속에 여러 가지 유형의 작은 물체를 항상 가지고 다니는데 고성능 폭약 3킬로 그람이 터지는 위력과 맞먹는다. 광주사태가 진압되면서 우리 부대는 모두 갈라졌는데 혹시 남한의 산속이나 도시 속에 숨어 있다가 훗날 북으로 돌아오지 않았으면 남한에 이미 전에 알고 있던 조직선과 연계하여 해외로 탈출했을 수도 있다. 혹시 남한에 남아있던 사람들은 신분을 세탁하고 사회 각 분야에 잠복하여 지금도 간첩행위를 하고 있을지 몰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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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명의 맺는말

 

북한 김일성의 명령을 받고 남파되어 1980년 5월 광주사태에 참가한 조선로동당 중앙당 연락소 전투원의 증언을 이것으로 끝마친다. 필자는 인터뷰한 글을 마감하며 해방 후 대한민국의 잘못된 과거사를 바로 잡아 올바른 국가관과 정체성을 세워주길 국민들에게 부탁드린다.

 

5.18광주 사태 당시 북한군의 총에 맞아 세상을 떠난 국군 장병들과 시민들, 경찰들에게, 또한 이 나라를 지키고 있는 국군 장병들과 애국적인 국민들에게 이 글을 삼가 드린다.

 

 

 

 

2012.7.22.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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