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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교연 교단장과 단체장, 임원, 교단 총무 국내 순교성지 순례
문준경 전도사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뜻 깊은 시간
2012년 06월 12일 (화) 17:39:44 한기총신문 webmaster@ccnkorea.com
   

한국교회연합(대표회장 김요셉 목사)7~812일간 국내 순교성지 순례를 통해 순교신앙을 가슴에 깊이 새기는 시간을 가졌다.

한국교회 일치와 연합의 열망을 담아 지난 329일 창립총회를 갖고 새롭게 출범한 한교연은 이번 순교성지 순례를 통해 이 땅에 복음을 전하다 거룩한 순교의 밀알이 되신 신앙 선열들의 거룩한 자취를 더듬어 보며 복음을 위한 선배들의 거룩한 순교신앙을 이어 받아 한국교회를 위해 한 알의 밀알이 될 것을 다짐했다.

대표회장 김요셉 목사와 공동회장 황인찬 목사(개혁 총회장) 등 교단장과 단체장, 임원, 교단 총무 등 65명이 참가한 이번 순례는 첫날 오전 8시 종로구 연지동 한국기독교연합회관 앞에서 버스 두 대로 출발해 전남 영광 염산교회(김태균 목사시무)와 야월교회(배길량 목사시무)와 전남 신안군 증도 문준경 전도사기념관, 대초리교회, 증도리교회 등을 둘러봤다.

이번 순례에는 특히 염산교회 출신이며 1년여 야월교회에서 말씀을 전해온 안영로 목사(예장 통합 증경총회장)가 전 일정을 동행하며 당시의 처참했던 상황을 생생히 증언했다.

 

77명이 순교한 한국교회 최대 순교지 염산교회

전남 영광은 6·25 당시 194명이 순교한 대표적인 개신교 순교지로 꼽히는 곳으로 그 중에 전남 영광군 염산면 봉남리 염산교회는 당시 전체교인의 3분의 277명이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미처 퇴각하지 못한 북한 공산군에 의해 순교 당했다. 이런 이유로 이곳은 한국 기독교 최대 순교지로 불리고 있다.

전쟁 당시 염산교회에는 독립군 출신의 김방호 목사가 담임하고 있었다. 영광 일대가 공산군의 손에 넘어가고, 교회당이 공산군의 사무실로 징발된 후에도 김 목사는 교우들과 마을에 남아 초대교회 카타콤처럼 비밀리에 예배를 드리며 믿음을 지켜왔다. 사건은 9·28 수복 후 북진하는 국방군의 환영대회를 염산교회 청년회가 앞장서 주도하면서 비롯됐다. 아직 후퇴하지 않고 남아있던 공산군들과 좌익세력이 이에 대한 보복을 자행하면서 엄청난 살육이 이어졌다. 107일 환영대회에 앞장섰던 기삼도, 노용길 등 청년들을 처형하고, 교회당을 불에 태운 것이 신호탄이었다. 이튿날부터는 염산교회 교인들을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몽둥이와 죽창으로 가족단위로 학살하기 시작했다. 마을 앞 설도포구의 수문통에는 무려 77명이나 되는 교인들이 목에 큰 돌이 매달린 채 수장되고 말았다.

초대교역자였던 이신 장로, 2대 교역자였던 원창권 목사, 3대 교역자였던 김방호 목사 모두가 가족들과 함께 목숨을 잃었다. 전 교인의 2/3가 희생된 기막힌 사건이었다. 이들은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도 찬송하고 서로를 격려하며, 의연하게 죽음을 맞았다고 전해진다. 전쟁이 끝난 후 홀로 살아남은 김방호 목사의 차남 김익 전도사가 부임하여 염산교회의 명맥이 다시 이어지기 시작한다. 김 전도사는 학살의 주범이던 좌익인사들을 찾아다니며 용서와 사랑의 마음을 전했다는 감동적인 이야기도 남아있다.

마을 입구를 장식한 순교자의 길표지석을 지나 예배당 입구에 들어서면 순교자들을 합장한 거대한 봉분과 순교 기념비, 그리고 그들을 추모하는 십자가 돌탑이 눈에 뜨인다. 본당 옆에는 순교기념관이 서있다. 이 순교기념관 건립사업은 당시 좌우 사상대립으로 인한 갈등이 아물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이들 순교자들의 정신이 드러나지 못해 안타깝게 여긴 지역 교계가 앞장을 섰다. 이들은 기독교 순교자 기념사업 추진위원회를 결성하고 노력한 끝에 2008년 초 영광군의 지원으로 염산교회 내에 300평 규모의 순교기념관을 건립하게 된 것이다.

 

교인 전체가 순교한 영광 야월교회

배유지(유진벨)선교사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전주, 군산, 나주로 하여 목포에 선교센터를 만들고 전라지방에 복음을 전하던 중 야월리 포구에 정박하여 복음을 전하며 1908년에 염산리 교회를 세우게 되었고 후에 이 교회를 야월교회로 개칭하게 된다.

일제시대에는 야월리에 일본의 침략정책에 저항하는 소위 상록 사상을 가진 청년들이 이곳에 와서 정착하며 농촌 잘 살기 운동, 애국사상 고취운동, 생활개선운동, 한글 가르치기 운동 등을 펴기 시작하였으나 일본의 반대로 중앙과 연락하는 과정에서 장애가 극심하여 잘 연락이 되지 않으므로 YMCA에 몸을 담게 되고 여기에서 이들은 복음을 듣게 되어 이들이 주축이 되어 야월 교회를 설립하게 되었다.

19506.25 동란이 지나가고 9.28 수복이 될 대 기독교인들이 태극기를 들고 국군과 UN군을 환영했다 하여 공산군 잔당인 빨치산 공비들이 마지막 철수 직전 교인들을 잡아 처형했다. 김성종, 조양현 영수와 최판섭, 최판원 집사는 염산 설도 수문 앞에서 개별적으로 끌어다 물에 빠뜨려 처형하였고 그의 가족들과 수많은 교인들은 두우리 쪽 큰 북재 넘어 공동묘지에 직경 6m 넓이의 구덩이를 파서 밤에 손과 몸뚱이를 묶어서 구덩이에 생매장시켜 죽이기도 했다.

후에 한 구덩이에서 80구의 사체를 발굴하기도 했다. 이어서 그 해 10월 어느 날 그들은 교회당 건물까지 소각해 버려서 그 곳은 몇 년 동안 교회 없는 마을이 되었었다. 야월 교회 성도들은 하나같이 값진 신앙을 지키다가 한 분도 남김없이 살해되어 순교제물이 되어진 것이다. 교회가 불타고 교인이 한 명도 남김없이 순교하였고 교인 대다수가 생매장 되어 순교를 한 점이 한국 교회사에서 유일한 교회이다

우리나라에서 최고의 복음화율을 자랑하는 곳이 바로 전라남도 신안군이다. 크고 작은 섬들로만 이루어진 신안군의 복음화율은 35퍼센트로 전국 평균의 두 배에 이른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증도는 주민의 90퍼센트 이상이 예수를 믿는 전국 복음화율 1위의 섬이다.

마을 사람 거의 대부분이 크리스천으로 주민 2,200여 명인 작은 섬에 교회만 11개가 세워져 있다. 예로부터 섬사람들은 토속 신앙을 믿으며 살아왔다. 이런 오랜 전통 때문에 섬은 기독교 신앙이 전파되기 가장 어려운 곳 중 하나였다. 이런 곳에 어떻게 개신교가 들어가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워 전국 복음화율 1위의 섬을 만들 수 있었을까?

증도에 처음으로 복음을 전파한 사람, 신안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섬들을 나룻배를 타고 돌아다니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끈질기게 주민들을 설득하고 먹이고 입히고 돌보면서 교회를 세운 사람, 그 사람은 목사도 선교사도 아닌 연약한 한 여인이었다. 섬마을의 어머니 문준경 전도사. 그녀가 있었기에, 그녀의 눈물겨운 헌신의 삶이 있었기에, 그녀가 뿌린 숭고한 순교의 피가 있었기에 오늘날 신안군과 증도가 존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대초리교회에서 문준경 전도사를 만나다

문준경 전도사님의 순교의 열매로 주민 90%이상이 그리스도인이 된 섬 일명 천국의 섬증도(시루섬)에 세 번째 개척한 교회가 대초리이다.

전남 신안군 암태면 수곡리의 작은 섬에서 출생한 문준경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부지런해 주위의 칭찬과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190817세의 나이에 신랑의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한 채 중매결혼을 해야 했으나 외지를 도는 남편은 아내를 돌보지 않은 채 목포에 소실을 두고 자녀까지 낳아 살고 있었고 문준경은 이때부터 자신은 남편 있는 생과부라며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지내야 했다

그러나 며느리로서 시부모를 극진히 모시고 형제간의 우의를 돈독히 하는 데는 한치의 어긋남이 없었다. 그리고 남는 시간을 시부모님의 허락을 얻어 국문을 깨우치고 한문을 공부하는데 할애했다. 자신을 극진히 아껴주던 시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시어머니도 큰 시숙과 생활하게 돼 갈 곳이 없어진 그녀는 목포로 건너와 단칸방에서 삯바느질을 하며 외롭고 고달픈 삶을 살았다

이런 그녀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한줄기 놀라운 빛으로 다가왔다. 예수를 믿으면 삶의 기쁨과 감사가 넘친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간 교회가 유명한 성결교부흥사인 이성봉(李聖鳳)목사(당시 전도사)가 초가집 한간을 얻어 막 개척을 시작한 북교동성결교회였다1년 만에 학습과 세례를 받고 개인전도와 축호전도에 가장 열성을 보이는 성도가 되었다. 집사직분을 받은 그녀는 하나님 앞에 자신의 인생을 헌신할 것을 서원하고 죽을 때까지 복음을 전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서울에 있는 경성성서학원(서울신대전신)에서 공부할 수 있게 되길 간절히 기도한 결과 청강생으로 입학을 할 수 있었다. 당시 결혼한 여자는 입학할 수 없는 관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공부를 열심히 해도 정규학생이 아니라는 이유로 장학금도 받지 못하는 등 어려움을 겪던 그녀는 이성봉목사의 보증과 요청으로 결국 정규학생이 되어 기숙사에도 들어갈 수 있었다.

문전도사의 전도열정은 남달라 방학마다 고향으로 내려가 33년 진리교회를 설립한 것을 시작으로 35년 증동리교회, 36년 대초리교회를 차례로 건립했다방축리에는 기도소를 지었다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상태에서 오직 믿음만으로 교회를 세운 그녀에게 수많은 어려움과 고초가 쉬지않고 따랐으나 기도는 언제나 승리를 안겨 주었다졸업 후에도 대도시를 마다하고 증도로 돌아 온 문전도사는 나룻배를 타고 이섬 저섬 무교회지역을 돌며 교회를 개척하고 복음을 전했다.

그녀는 주민들의 부탁으로 짐꾼노릇, 우체부 노릇을 마다하지 않았고 섬 주위 돌짝 밭길을 얼마나 걸었는지 1년에 고무신을 아홉컬레나 바꿔 신었다고 전해진다. 문전도사의 열정적인 기도는 신유의 은사까지 더해 정신병자, 중풍병자를 고쳐내 섬 여의사란 말까지 들을 정도였다.

1943년 일제의 탄압으로 성결교단이 강제 해산됨과 동시에 문전도사가 개척한 증도교회에까지 여파가 미쳤다. 그녀가 신사참배를 거부했다며 목포경찰서로 불러내 고문을 일삼았다. 이 때 마다 문전도사는 찬송가 환란과 핍박 중에도 성도는 신앙 지켰네를 부르며 에스더서 416죽으면 죽으리라를 수없이 되풀이 했다아무리 회유와 협박이 이어져도 굴욕적인 신사참배는 허락치 않았다.

그런데 해방 후 공산당을 따르는 좌익들의 활동은 이 작은 섬까지 영향을 미쳤다. 특히 6·25 후 지역 전체가 인민군의 손길에 넘어가자 평소 교회를 못마땅하게 여겼던 이들이 문전도사와 성도들을 못살게 굴었다1950104. 국군이 증동리섬까지 들어온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악의에 찬 공산당원들은 교인과 양민들을 바닷가 모래사장으로 이끌어 냈다

그리고 한사람씩 몽둥이로 내리치고 죽창으로 찔러 죽이는 엄청난 만행을 저질렀다. 문전도사에게 와서는 새끼를 많이 깐 씨암탉이구만이라며 몽둥이로 내리쳤고 그녀는 아버지여 내 영혼을 받으소서라는 마지막말을 남기고 괴뢰군의 총탄에 의해 순교했다. 당시 59. 이 사실은 옆에 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수양딸 백정희 전도사에 의해 알려졌다. 문전도사의 헌신과 사역은 한 톨의 밀알이 되어 30, 60, 1백배의 열매를 거두었다

첫날 일정을 마친 순례단은 증도 엘도라도 리조트에서 여장을 풀고 이튿날 증동리 교회와 문준경 전도사 순교기념관을 둘러봤다.

 

한국교회 믿음의 산실된 증동리 교회

또 증동리 교회당은 순교의 피묻은 현장의 모래로 만든 벽돌로 신축되었다. 평소에 문준경 전도사는 양딸인 백 전도사에게 자기는 정씨 문중 선산에 묻힐 수 없으니 자기가 죽으면 그 산 아래 밭의 한 모퉁이에 묻어달라고 했다. 순교 1주기 때 이 얘기를 들은 정씨 문중에서는 전도 받은 분들도 많아 문중회의를 열었다.

결국 문준경 전도사는 문중을 빛낸 분이니 선산 중앙에 모시자고 만장일치로 결의해서 지금 묘는 정씨 문중 선산 한가운데에 있다. 문준경 전도사는 일제시대나 6·25사변 당시 여성이 사역자로 활동하는 경우가 극히 적었으나 이 가운데 성결교단의 문준경(文俊卿·18911950)전도사의 경우는 여성사역자로서 성결교를 대표하고 있다. 한국교회의 중추적 역할을 감당하는 수많은 목회자들이 문준경 전도사가 설립한 섬 교회를 통해 배출하였다.

문전도사가 고향인 전남 신안군의 섬들에 설립한 증동리 교회, 임자 진리 교회, 대초리 교회, 우진리 교회, 병풍리 교회, 사옥 교회, 장고리 교회 등 10여 교회는 오늘날 기독교를 대표하는 수많은 목회자들(김준곤 이만신 정태기 이만성 이봉성목사 등 30여명)을 배출하는 믿음의 산실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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